[지성에 한국의 길을 묻다] <4·끝> “국민 모두 행복하려면 보수·진보 대립 넘어 이념의 통섭으로 가야”

입력 2017-01-15 18:28 수정 2017-01-15 21:00
진보 진영의 대표적 학자인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2017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국가 대혁신이라고 규정짓는다. 구체제 청산을 위한 근본적인 제도 개혁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윤리의식 회복을 강조한다. 김 교수가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본사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편집국 사진부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영희 기자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넘어 낡은 대한민국의 리셋(reset)과 새로운 대한민국의 리뉴얼(renewal)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박정희 체제’의 그늘과 ‘87년 체제’의 그늘을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시대정신은 국가대혁신이다. 김호기(57) 연세대 교수가 주장하는 우리 사회의 핵심 과제다.

김 교수는 국내 진보진영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대통령 탄핵정국을 맞아 그는 더욱 바빠졌다. 정책 제시와 언변 능력이 탁월해 최근 신문·방송 토론회, 좌담 등의 단골 초대 손님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중순에는 국가미래연구원과 경제개혁연구소·경제개혁연대 등 보수와 진보진영이 공동 개최한 ‘탄핵 이후 한국사회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토론회에서 주제 발제를 맡기도 했다. 2017년을 맞아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묻기 위해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본사에서 진행됐다. 본보 신년인터뷰 마지막 편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기본 성격을 규정짓는다면.

“이번 게이트의 특징은 헌법의 제1수호자여야 할 대통령이 헌법 정신을 스스로 부정했다는 것이다. 핵심은 국가의 공적 영역에 있지 않은 사적 개인인 최순실 일파들이 아무런 정당성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권력을 남용했고, 박 대통령이 이를 사실상 허용했다는 점이다. 권력의 사유화는 민주주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훼손한 것이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정부가 기업 등으로부터 공물을 거둬들이는 약탈국가적 성격을 보여줬다. 또 공포를 동원하는 유신독재시대의 통치방식으로 되돌아갔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대표적 사례다. 외신이 ‘초현실적 사건’이라고 보도했듯 샤머니즘적 요소 등은 모범적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국민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도 안겨줬다.”

-근본적 원인과 문제점은 무엇인가.

“제도적 원인과 개인적 원인으로 나눌 수 있다. 제도적으로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돼 있다. ‘87년 체제’의 그늘이 제왕적 대통령제다. 수많은 공직을 직접 임명하는 인사권과 400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편성권을 바탕으로 전통사회의 군주와도 같은 권력을 행사해 왔다. 민주적 절차에 해당하긴 하지만 제도적 문제점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능력이다. 박 대통령의 통치 역량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인구 5100만이 넘는 나라를 통치할 능력이 있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박정희 체제’의 그늘인 억압적·권위적 통치방식에 리더십의 빈곤, 그리고 제왕적 대통령제가 결합돼서 나타난 것이다.”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대선이 치러지는 2017년 시대정신은 국가대혁신이다. 대통령 퇴진을 넘어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청산이 국민적 요구다. 낡은 대한민국을 리셋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리뉴얼해야 하는데 그게 국가대혁신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빛과 그늘 가운데 긍정적 부분은 계승하되 그렇지 않은 부분은 대혁신해야 한다. 국가대혁신의 양축은 ‘새로운 경제’ ‘새로운 정치’다.”

-새로운 경제, 새로운 정치란.

“고착화하는 저성장과 점증하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새로운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는 산업부문 재편,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 격차 등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노동시장 개혁,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복지정책 강화가 중요하다. 복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중(中)범위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재정 확충이 반드시 필요하다. 증세 없는 복지는 없다. 국민 설득이 관건이다. 이는 차기 정부의 당면 핵심과제가 될 것이다. 새로운 정치란 정부든 국회든 국민의 대표성이 제대로 반영된 정치를 일궈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는 권력구조 개편이 이뤄져야 되고, 사회 변화에 따른 국민 기본권 강화 조항이 필요하다.”

-정치권은 대선 전 개헌과 대선 후 개헌으로 나뉘고 있다.

“봄이나 여름에 대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대선 전 개헌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개헌을 대통령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걸고 차기 정부가 곧바로 추진해야 한다. 그간 개헌은 공수표된 게 문제인데 국민과의 신성한 약속으로 반드시 지킬 필요가 있다. 헌법은 그 나라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준비를 많이 한 것은 알고 있지만 개헌의 주체는 국회 못지않게 국민이다. 국민이 생각해보고 논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권력구조가 있나.

“일단 의원내각제를 선호하는 편이다. 프랑스가 이원집정부제, 미국이 대통령제이지만 대부분 선진국은 내각제를 하고 있다. 선진국 입구에 있는 우리나라도 내각제로 갈 시점이 됐다. 우리 정치과제 중 대단히 중요한 건 새로운 협의적·합의적 전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협의민주주의, 합의민주주의를 추진하는 데는 내각제가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이를 강하게 주장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 선진국을 뒤쫓아가는 추격국가다. 세계경제의 불확실성, 남북 간 군사·정치적 긴장 고조 등의 측면까지 고려하면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이 때문에 4년 중임 대통령제도 의미 있는 방법이다. 물론 그 경우 대통령 권력을 분산하는 제도적 장치는 필요하다.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국민여론이 1차적 기준인 것 같다.”

-보수여당이 처음으로 분열돼 보수개혁신당이 떴다. 우리나라 보수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 아울러 진보진영에도 건설적 충고를 한다면.

“한국 보수의 문제점은 철학의 빈곤이다. 서양 보수의 핵심 가치 3가지는 안정 속 개혁, 사회통합, 공동체 중시다. 우리 보수는 개혁 없는 안정 세력에 불과하다. 사회통합에도 소홀하고, 공동체주의적 성격이 아니라 개인주의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둘로 나뉜 국민을 하나로 묶는 ‘한 국민(one nation)’을 강조한 영국 보수주의자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를 보라. 그게 진짜 보수다. 우리 보수는 철학을 바로 세우고 그것을 정책으로 구현하는 게 과제다. 진보진영은 이념보다는 국가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비판을 넘어서 미래 비전과 정책 수단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으면 한다. 21세기 선진국에는 이념의 통섭현상이 나타난다. 보수는 진보적 정책을 가져다 쓰고 진보는 보수적 가치를 중시한다. 그런데 세계사적 추세와 달리 우리는 이념 대립이 심각하다. 국민 개개인이 모두 행복한 나라를 만들려면 이념적 통섭으로 나가야 한다.”

-차기 국가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을 말한다면.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얘기했던 정치가의 세 가지 덕목이 있다.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이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라도 정치가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가 중요하다. 추진한 정책이 국민 삶에 기여했는지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옳고 그름의 차원인 ‘신념의 윤리’가 아니라 ‘결과의 윤리’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때 우리는 두 가지가 동시에 침몰했다. 제도가 침몰했고 윤리가 침몰했다. 세월호 관련자들이 제대로 된 윤리의식을 가졌다면 엄청난 피해를 줄였을 수 있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제도만 바뀐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윤리, 사고방식,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 그간 우리의 사고방식을 지배해 왔던 것은 ‘욕망’인데 윤리야말로 생명이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공동체적 윤리를 회복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그게 바로 새로운 마음의 상태다. 민주적 정치, 활발한 경제, 따뜻한 사회를 제대로 일궈가기 위한 제도 개혁에 더해 새로운 윤리가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제도 측면에선 지속가능한 발전, 경제민주화, 노동시장 개혁, 복지국가 구축, 시민민주주의 구현 등 5대 분야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양극화에 따른 불평등이 심각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 개혁이 중요하다. 계층 상승 사다리가 무너졌다. 우리 사회의 과도한 경쟁도 문제지만 최근 더욱 우려되는 현상은 세습주의적 경향이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새로운 세습주의의 도래라고 분석했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수저계급론이 그걸 상징한다. 계층 사다리를 복원하는 게 중요한 과제다. 유효한 방법은 교육이다. 사회적 약자 계층에 더 많은 교육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서울대가 실시하는 지역균형선발, 기회균등선발처럼 사회 이동, 계층 이동의 제도적 장치를 더 만들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경쟁사회를 넘어서 완전히 세습사회로 고착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패자부활제도다. 우리는 학벌이 평생 자신의 삶을 구속한다. 실패하더라도 기회를 주는 패자부활제도를 제대로 설계해야 한다. 정부 역할도 중요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한·미관계 및 남북관계도 초미의 관심사다.

“트럼프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과거보다는 미국 이익 우선주의를 강화할 것임은 분명하다. 차기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혜롭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이명박·박근혜정부의 보수적 강압정책이나 김대중·노무현정부의 진보적 포용정책 모두 한계를 드러냈다. 포용정책이 강압정책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만 두 정책 다 성과를 거뒀다고 보기 어렵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지 못했다. 새 정부가 구성되면, 쉽지는 않겠지만 제3의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 목표는 한반도 평화공존, 남북한 경제협력 강화,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이라고 생각한다.”

김호기 교수는

대표적인 진보 성향 학자다. 사회 경제 노동 이슈 등과 관련해 지속적으로 진보 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1960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에서 사회학 학사·석사,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92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2002년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취임사준비위원회 위원, 같은 해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국민통합분과 사회언론위원을 맡았다.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회 외부위원으로도 위촉됐다. 현재 진보 진영 싱크탱크인 ‘좋은정책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글=박정태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tpark@kmib.co.kr, 사진=서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