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금미의 시네마 패스워드-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잊지 않고 잇기 위하여

입력 2017-01-15 18:53 수정 2017-01-15 21:24
국내 개봉 12일 만에 220만 관객(15일 기준)을 동원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극 중 장면. 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여금미
첫사랑의 이름, 전화번호, 어떤 날짜…. 괴롭고 지긋지긋해서 잊고 싶지만 도저히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혹은 너무나 애틋하고 그리워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과 숫자 한 두 개쯤은 누구의 마음에나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이러한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일본의 시골 마을 이토모리에서 전통을 이어 가는 여고생 미츠하는 단 하루라도 도쿄의 멋진 남학생으로 살아보기를 간절히 꿈꾼다. 그래서일까? 대규모 혜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기 직전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잠에서 깨어나보니 도쿄에 사는 동갑내기 남학생 타키의 몸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 이후 몇 번에 걸쳐 미츠하와 타키는 서로의 삶 속에서 좌충우돌 촌극을 벌이는 한편 혜성의 파편이 이토모리에 떨어져 일으킬 엄청난 재난을 막아보려 고군분투한다.

신체 교환이라는 모티브는 지금까지 수많은 판타지 장르에서 즐겨 활용돼왔다. 어떤 친숙한 대상에게 전혀 다른 낯선 정체성이 덧입혀질 때, 그 간극은 기이한 공포나 웃음을 유발한다. 외양과 내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의 유희를 영화만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또 있을까? 이질적인 두 주인공의 몸 바꾸기가 중심이 된 이 작품에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여러 대립항들이 차이를 부각시킨다. 남과 여, 도시와 시골, 전통과 현대성,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그리고 기억과 망각.

‘내 사랑 히로시마’(1959)를 통해 재난의 기억, 망각의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프랑스 여성과 일본 남성의 짧은 사랑 이야기로 풀어낸 프랑스 감독 알랭 레네는 “재난은 우리를 그저 구경꾼으로 만들 때, 망각될 때, 비극적인 것이 된다”고 했다. 타키는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낮과 밤의 차이가 사라지는 황혼의 시간, 개와 늑대가 구별되지 않는 시간에 미츠하가 된 타키, 타키가 된 미츠하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만나게 된다.

타인의 존재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 미츠하의 외할머니 히토하는 이를 ‘이음’ ‘맺음’을 의미하는 일본어 단어 ‘무스비(結び)’로 설명한다. “실을 이어 매듭을 만드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모두 신의 영역이야.”

그리고 여기 ‘세월호’라는 이름과 304명의 희생자, 4·16이라는 숫자를 1000일이 넘도록 마음으로 되새겨온 사람들이 있다. 소박한 끈의 양 끝을 교차시켜 이은 노란 리본을 본다면 히토하는 “이것도 무스비”라고 속삭일 것이다. 촛불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물결을 이루는 것도 무스비, 잘려나간 채 망각될 뻔했던 7시간의 진실이 뒤늦게나마 드러나는 것도 무스비. 영화는 이렇게 바다 건너편 우리에게도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미츠하와 타키가 이루어낸 무스비는 시공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적조차 만들어낸다. 너와 나 사이의 차이를 딛고 일어서는 연대야말로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힘일지도 모르겠다.

새해 첫 달부터 영화 이야기를 통해 격주로 국민일보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 또한 무스비. 한 편의 영화에서 대사 한 줄을 뽑아내 새로운 의미로 향하는 통로를 여는 암호로 삼는다는 뜻으로 칼럼의 이름을 ‘시네마 패스워드’라 정했다. 영화 속에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수많은 말들 중 한 마디를 한 올씩 캐내어 알록달록 다양한 빛깔을 담은 매듭으로 정성껏 이어보려 한다.

필자 여금미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3대학(소르본 누벨)에서 영화미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고려대학교 응용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영화 및 인문학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