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석 <1> 가족 3대가 겪은 전쟁 공포… “북한 선교로 전쟁 막자” 다짐

입력 2017-01-15 21:07
학군사관후보생(ROTC) 집체훈련을 받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강원도 원주 36사단 교육장에서 동료 후보생들과 함께 한 필자(왼쪽).

2015년 8월 20일 오후 부산역에서 서울행 고속철도(KTX)를 기다리던 나는 가족 카톡방에 올라온 글을 읽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 전쟁 나는가 봐요. 인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요.” 며느리가 쓴 메시지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깜짝 놀라 TV 앞으로 가니 서부전선에 있는 우리 군부대가 북한군 진지를 향해서 30여발의 포탄을 발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연은 이랬다. 2주 전 경기도 파주의 비무장지대(DMZ)에 매설된 지뢰가 폭발하면서 부사관 2명이 각각 다리와 발목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은 사고가 발생하였고, 우리 군은 대북 확성기방송으로 대응했다. 이에 북한군이 확성기를 향해 포격을 가해오자 우리 군이 다시 포격으로 맞서면서 준전시상태에 돌입했다. 그런데 대응포격을 한 부대가 바로 작은 아들이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부대였다. 우리 군이 포격을 실시한 후 북한군이 원점타격으로 도발할 것을 우려한 부대에서는 가족들의 대피를 당부했고, 이에 따라 피난민 1호가 우리 집에서 발생한 것이다.

많은 국민들은 확전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밤잠을 설쳤지만, 우리 가정만큼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한 일간신문이 주관하는 ‘통일과나눔펀드’ 운영위원장으로 일하던 나는 다음 날 한강포럼의 조찬모임에 참석해 70, 80대 회원들이 마련한 성금을 전달 받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어제 밤에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불행히도 저는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제 작은 아들이 어제 북한에 포격을 가하고 비상사태에 들어간 부대에 근무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대학 3학년 때 6·25가 일어나서 학업을 중단하고 참전했습니다. 전쟁 중에 입은 내상으로 국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에 내가 태어났습니다. 내가 대학 4학년으로 학군후보생(ROTC) 후보생 집체훈련을 받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태가 확전될 경우에 현지 임관으로 참전한다는 통보를 받고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나는 이것으로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이 된 아들이 전시상황에 대처하느라 잠도 못자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이 비극이 3대로 그쳐야 할까요? 아니면 4대까지 가야하나요?”

인사말을 하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 얘기를 듣던 어르신들 중에도 눈시울을 붉히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다행스럽게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이 열렸고 남북은 ‘무박4일’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극적인 합의를 통해 평화롭게 해결되었다. 이 닷새 동안 나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게 해주십시오. 평화통일을 주십시오.”

대를 이어 계속되는 우리 집안의 수난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사람들은 나를 ‘통일 전문가’라고 부른다. 북한을 100여 차례 다녀 온 목사인데다가, 대북지원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총장과 한민족복지재단 회장을 지내고, 여러 신문사가 설립한 통일단체의 운영위원장을 역임했으니 당연한 말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경력만 보고 선입견을 가진 사람은 나의 설교나 강연을 듣고 보수적인 안보관에 놀랐다고 얘기한다. 어찌 보면 이율배반적인 것 같기도 한 나의 삶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북한선교 사역자로서 나의 길은 운명일까. 사명일까.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약력=△건국대 사학과 △경희대 대학원(역사학 박사) △전 총신대 교수 △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총장 △한민족복지재단 회장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새천년 지구촌빈곤퇴치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그레이스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