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9시26분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탄 검은색 체어맨 승용차가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 주차장에 들어섰다. 주차장 주변은 “이재용을 구속하라”는 반도체 노동자 인권단체(반올림) 회원 등의 고성으로 가득 찼다. 피의자 신분으로 8년10개월 만에 특검에 불려나온 이 부회장은 포토라인에 서서 “이번 일로 저희가 좋은 모습을 못 보여드려 정말 송구스럽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달 청문회 자리에서처럼 희미한 웃음을 띠기도 했지만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취재진이 “국민들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을 경영권 승계에 이용한 것 아니냐”고 질문했지만 답하지 않았다.
이 부회장은 이날 특검팀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대치동 대치빌딩으로 불려나와 다음날 새벽까지 조사받았다. 박영수 특별검사와의 면담 절차 없이 곧바로 피의자 신문이 시작됐다. 19층 영상녹화조사실 안 4명이 앉을 수 있는 사각형 책상에서 조사가 진행됐다. 대기업 수사 전문가로 꼽히는 한동훈 부장검사와 김영철 검사가 번갈아 가면서 이 부회장을 신문했다. 조사실의 한 벽면은 가로 2m, 세로 1m쯤 되는 특수유리로 돼 있다. 안쪽에서는 거울로 보이지만 반대편에서는 조사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양재식 특검보가 특수유리 반대편에서 실시간으로 상황을 지켜보며 조사를 지휘했다. 박영수 특검도 밤늦게까지 이 부회장 조사 상황을 보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신문 과정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호칭은 ‘피의자’로 불렸다고 한다. 이 부회장은 점심식사로 6000원짜리 도시락을 먹었고 저녁은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최순실 게이트’ 특검팀이 재벌 총수를 소환해 조사한 건 이 부회장이 처음이다. 이날 오전 8시30분부터 취재진, 시민단체, 경찰 등 300여명이 대치빌딩 주변에 몰렸다. 이 부회장의 차량이 들어오는 테헤란로부터 빌딩 주차장까지 200m 거리에 경찰 병력이 약 10m 간격으로 도열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오전 9시16분쯤 서초사옥에서 출발한 이 부회장은 10분 만에 특검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 부회장이 차량에서 내리자 시민단체 회원들은 ‘국민연금 강탈 이재용 구속’ 등의 피켓을 들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일부 정의당 당원들은 얼굴에 박근혜 대통령과 이 부회장 가면을 쓰고,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인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한 시민단체 회원은 “정유라한테 말을 사준 삼성전자는 삼마(三馬)전자냐”고 조롱하기도 했다. 취재진은 “이 부회장의 범죄냐. 삼성 임직원들의 범죄냐” 등 8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이 부회장은 답하지 않았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임직원 10여명이 대치빌딩 주차장에서 이 부회장의 출석 모습을 지켜봤다. 특검의 칼날을 막기 위해 삼성그룹은 이 부회장 조사 직전까지 법리 검토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이 부회장 조사에는 대전지검 특수부장, 저축은행 합동수사단 팀장 등을 거쳤던 법무법인 태평양 이정호 변호사가 동행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 등을 지낸 오광수 변호사도 변호인단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특검 조사에서 2015년 7월 25일 박근혜 대통령과의 독대 이전 최씨 모녀에 대한 승마협회 지원 논의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팀은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승마협회 회장)도 이날 소환해 이 부회장과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는지 조사했다.
글=나성원 기자 naa@kmib.co.kr, 사진=서영희 기자
이재용 “좋은 모습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입력 2017-01-12 17:35 수정 2017-01-12 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