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협상 ‘부메랑’… 日은 도발, 韓은 침묵

입력 2017-01-10 05:09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참석해 박근혜 대통령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종이팻말을 들고 있다. 최근 일본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 요구로 위안부 문제에 미온적인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도 거세지고 있다. 뉴시스

일본 정부가 9일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를 일시 귀국시키는 등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해 대응 강도를 높이면서 국내 정치권 역시 ‘합의 무효’를 포함한 강력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반면 외교부를 비롯한 한국 정부의 대응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최근 주한 일본대사를 외교부 청사로 불러 ‘면담’한 것이 전부다. 신년 업무보고에서 외교·안보 분야를 첫 번째로 앞세우며 중요성을 강조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대응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우선 일본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까지 공격 일선에 나선 상황에서 ‘강대강’으로 맞부딪쳐봤자 실익이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외교부 당국자는 9일 “국민감정을 생각하면 적극 대응하는 것이 좋아 보이겠지만 정부는 원칙을 지키면서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치밀하게 공세 전략을 짠 일본의 속내를 파악하고 섣부른 대응이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정부 판단인 셈이다. 그러나 이는 정부가 관련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만 보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선 2015년 12월 28일 합의 당시 소녀상에 대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한 모호한 발표문이 현 상황을 초래했다는 비판론도 제기하고 있다. 당시 우리 정부가 일본의 집요한 소녀상 철거 요구에도 ‘민간단체 사업’이라는 논리로 적극 반박했어야 하는데 이를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한을 정한 합의에 급급해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재협상 여부로 이 문제를 접근할 경우 상황은 복잡해진다. 일본에 맞대응한다는 차원에서 위안부 합의 파기나 재협상 등을 주장할 경우 실익은커녕 역효과만 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한국이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일본 측 주장이 강한 상황에서 파기나 재협상을 먼저 선언할 경우 그로 인한 후폭풍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성한 전 외교부 차관은 “현 상황에서 현상 변경을 시도하면 대외 공신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이 경우 중요한 안보 관련 결정을 주변국 눈치를 보면서 해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한·일 양국 정부가 당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합의라고 명시한 만큼 이를 뒤집는다는 것은 그만큼 큰 부담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는 일단 오는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맞춰 축하 서한을 보내 주변국과의 외교 위기 해법을 모색할 방침이다. 권한대행 체제에 들어선 후 트럼프 당선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 관계자는 “황 권한대행이 트럼프 당선인에게 기존 축전보다는 실질적인 내용이 담긴 서한을 전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미국 신행정부와의 사실상 첫 외교활동인 셈이다. 사드 배치와 위안부 소녀상 문제로 주변국과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시도한다는 의도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