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염성덕] 자본시장의 ‘공공의 적’

입력 2017-01-09 17:52

자본시장에도 최순실씨 같은 부류가 있다. 내부·미공개 정보를 악용해 내부자거래를 일삼는 이들이다. 최순실씨가 국정을 농단했다면 이들은 공정한 거래 질서를 해치는 자본시장의 ‘공공의 적’이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 한미사이언스와 한미약품 임직원, 관세청 공무원 등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한진해운의 자율협약 신청 사실이 공개되기 직전 주식을 팔아 10억원의 손실을 회피한 혐의를 받고 있는 최 전 회장은 결국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됐다. 서울남부지검은 구속영장이 기각된 최 전 회장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지난달 30일 밝혔다. 이 사실은 연말이라 이목을 끌지도 못했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의 기각 사유를 검토한 결과 재청구를 해도 영장 발부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며 “최 전 회장의 상속세 포탈 혐의는 계속 수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최 전 회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법원은 “범죄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가 충분히 확보돼 있다”면서도 “증거 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고 기각 사유를 설명했다. 증거가 충분했는데도 구속영장을 기각한다는 뜻이다. ‘재벌 비호’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한미약품은 2년째 내부자거래와 관련된 불명예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한미약품 연구원 노모씨는 2015년 3월 공개되지 않은 기술수출 계약 체결 정보를 증권사 애널리스트 양모씨에게 흘렸다. 이들은 주식을 사고팔아 상당한 부당이득을 챙겼다. 그런데 1심 재판부가 이들에게 징역형과 함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판결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심 재판부가 지난해 9월 이들에게 실형을 선고한 점이다.

한미약품과 한미사이언스 임직원 등은 지난해 9월에도 범죄 행렬에 가담했다. 한미약품은 그해 9월 29일 장 마감 후 호재를 공시하고 악재는 이튿날 오전 9시29분 공시했다. 악재를 뒤늦게 공시해 피해자들이 잇따랐다.

서울남부지검은 2개월가량 고강도 수사를 벌여 한미사이언스 임원 황모씨 등 4명을 구속 기소했다고 지난달 13일 밝혔다. 2명은 불구속 기소하고 11명은 약식 기소했다. 또 펀드매니저 등 2차 이상 정보 수령자들은 과징금 부과 대상으로 금융위원회에 통보했다. 이들은 미공개 정보를 활용해 33억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기거나 손실을 회피한 혐의를 받고 있다.

내부자거래라는 난장판에 관세청 공무원들도 뛰어들었다. 일부 직원이 서울 시내면세점 선정과정에서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주식 거래를 한 사실이 지난해 11월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것이다. 투자액이 많지 않아 큰 시세 차익을 올린 것은 아니라지만 공무원이 할 짓은 아니었다.

현행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이 낙제점을 받을 수준은 아니다.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불공정 거래를 한 사람에 대한 배상책임을 명시했고, 처벌조항도 강화했다. 내부자거래로 이익을 얻거나 손실을 회피하면 10년 이하 징역 또는 이익(손실회피액)의 1∼3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리도록 했고, 이익(손실회피액)이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에 처하는 가중처벌 조항도 마련했다. 하지만 검찰이 피의자를 약식 기소하거나 법원이 솜방망이 판결을 내리면 처벌조항은 사문화될 수밖에 없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2014년 연간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105명 중 30명(28.6%)만 실형을 선고받았다.

미국처럼 내부자거래에 한해 고의성이 없더라도 처벌하고 관련 기업에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자본시장법을 손질해야 한다. 걸리면 패가망신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염성덕 논설위원 겸 경제부 선임기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