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팽목항 르포] 광장의 촛불이 세월호 진실도 환히 비췄으면…

입력 2017-01-08 18:20 수정 2017-01-08 23:59
세월호 참사 1000일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시민들이 경기도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에 마련된 ‘416기억교실’을 둘러보고 있다. 벽에 걸린 2014년 달력 4월 15∼18일 밑에는 ‘수학여행’이라고 적혀 있다.안산=윤성호 기자
세월호 참사 1000일을 하루 앞둔 8일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진도항)의 모습. 진도=구성찬 기자
세월호 참사 1000일을 하루 앞둔 8일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진도항)을 찾은 추모객들의 모습. 진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세월호 참사 발생 1000일을 앞둔 지난 주말. 유가족들의 슬픔이 깃든 팽목항, 안산 합동분향소, 광화문광장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추모객으로 가득 찼다. 추모객들은 최순실 국정농단을 보며 세월호를 되새김질했다.

7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 잔뜩 찌푸린 하늘이 간간이 겨울비를 뿌렸다. 배에 오르려는 사람들과 차량이 몰려 팽목항 주변은 북적였다. 세월호 2주기였던 지난해 4월의 한산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가족대기실 옆 30㎡ 분향소에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슬픈 음악이 배경으로 흐르는 분향소에 걸린 TV모니터엔 희생자들의 영정이 순서대로 나타났다. 사망자 295명과 미수습자 9명 등 304명의 영정은 벽면에도 걸려 있었다. 사진 아래 추모제단엔 초코파이 등 과자가 수북했다.

제단 오른편 바닥엔 어른 검정고무신 8켤레와 예쁘고 앙증맞은 노란 고무신 1켤레가 가지런히 놓였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단원고 조은화·허다윤양, 남현철·박영인군, 양승진·고창석 선생님과 일반 승객 권재근·이영숙씨, 아빠 권재근씨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 돌아오지 못한 혁규군의 신발이다.

추모객들은 희생자들 소품과 생전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물을 훔쳤다.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경남 진주에서 온 김영주(42)씨는 “꼭 한 번 와서 추모해야 한다는 마음의 짐이 있었는데 오늘에야 짐을 덜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늘 보고 싶고 어루만져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인데, 이별의 준비도 없이 자식을 떠나보낸 채 하루하루를 기다리는 미수습자 가족의 슬픔을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팽목항 가족대기실에는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동생 재근씨를 기다리는 권오복(60)씨, 박은화양 어머니 이금희(47)씨, 허다윤양 어머니 박은미(47)씨가 자리를 지켰다.

은화양 어머니와 아버지 조남성(53)씨, 다윤양 어머니와 아버지 허흥환(53)씨, 사고 7일 만에 시신을 수습한 단원고 진윤희양 삼촌 김성훈(40)씨 등 6명은 여전히 팽목항에 머문다. 권오복씨는 “그동안 팽목항을 찾는 추모객의 발길이 거의 끊겼었는데 촛불집회 이후 지난달부터는 주말 하루 5000여명이 찾아와 위로해준다”면서 “세월호가 빨리 인양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오후 5시 방파제 등대길엔 다윤양 어머니가 차가운 난간에 손을 얹은 채 바다를 바라봤다. 그는 “가슴이 답답해지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에 나와 ‘제발 빨리 돌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며 울먹였다.

이날 경기도 안산 세월호 사고 정부합동분향사무소에도 추모의 발길은 이어졌다. 분향사무소 옆 컨테이너에 설치된 유가족실에서 만난 유가족 전인숙(45·여)씨는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이뤄져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전씨는 초등학교 6학년 딸에게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밤늦게 집에 들어가 소파에 웅크린 채 자는 딸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미안하다’고 속삭이며 아이를 안아 잠자리에 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광화문광장도 바삐 움직였다. 6일 세월호 천막 12동은 각자 6㎡ 남짓한 공간에 서서 추모객들을 맞았다. 희생자 304명 사진 앞에선 향과 초만 하염없이 타들어갔다. 노란리본공작소는 군번줄을 단 3×4㎝ 크기 노란 리본을 만들었다. 진실마중대는 행인들에게 진상을 밝혀 달라는 서명을 부탁했다.

1000일의 흔적은 이곳저곳에서 묻어났다. 2015년 7월 재단장한 흰 천막은 촛불과 향으로 검게 그을렸다. 세월호 천막을 관리하는 상황실엔 꺼진 난로와 담요, 노란 세월호 파카들, 서류와 프린터 등 사무용품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함께 진상규명을 외치던 유가족들도 서서히 지쳐갔다. “각자 삶이 있으니까”라는 희생자 이창현군의 어머니 최순화씨는 “하지만 마음까지 변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옅게 웃었다. 상황실장 김용택씨는 “활동을 이어가는 유가족은 이제 100명 정도”라며 “자식을 잃은 트라우마에다 사회에서 유가족을 바라보는 편견에 힘들어하는 분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000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최씨는 “우리는 참사 1일째부터 변함없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을 외쳐왔다”며 “힘과 거짓이 아닌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올 때까지 구호를 외치겠다”고 강조했다.

다시 세월호를 떠올리는 사람도 늘어났다. 진실마중대에 선 자원봉사자 조미선(52)씨는 “평일 300명 정도였던 서명자가 두 달 전부터 1000여명 안팎으로 늘었다”며 “대규모 집회가 있는 토요일에는 1만명 넘는 사람들이 서명한다”고 전했다. 분향객도 하루 1000여명으로 배 가까이 늘었다.

광장도 다시 기운을 낸다. “이제 시작”이라는 최씨는 “국민들이 세월호를 ‘나도 겪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분향소를 찾은 고등학생 최예린(18)양은 “광장에 들어온 촛불이 세월호의 진실도 환히 비췄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팽목항=김영균 기자

안산=강희청 기자, 오주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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