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원을 그만둔 양지원(가명·25·여)씨는 대학원 시절 한동안 인형뽑기방과 코인노래방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언제 교수님의 호출을 받을지 모르는 대학원생에게 ‘뽑기방’은 신속하고 저렴한 최고의 여가생활이었다. 양씨는 친구와 인형을 뽑는 ‘손맛’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학교 근처에서 뽑은 인형만 50여개에 달한다. 양씨는 “간편하면서도 신속, 저렴하게 놀 수 있다는 게 (뽑기방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자취생 민경준(25)씨는 하루 한 끼 정도를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4000∼5000원대 도시락은 ‘밥’이라는 느낌을 주는 데다 저렴하다. 그럼에도 민씨에게 편의점 도시락은 ‘간편하고 빠른 식사, 살려고 먹는 음식’을 벗어나진 못한다. 그는 “도시락을 먹는 건 음식을 시키고 기다릴 짬조차 없다거나 식사를 하려고 할 때 문을 연 식당이 없는 사람들인 것 같다”며 “식사는 휴식의 의미도 있는데 편의점 도시락이 유행하는 걸 보면 사는 게 퍽퍽한 것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불황이 낳은 유행’의 시대다. 편의점 도시락과 인형뽑기방, 코인노래방은 주머니가 가볍다고 외식이나 여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새로운 풍속도다. ‘간편 저렴 신속’의 가치가 높아지다 보니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유행어가 되기도 한다. 최소한의 물건들로만 살아가는 ‘미니멀리즘’ 라이프스타일도 인기를 얻으면서 경제·심리적 불황이 새로운 생활전략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뽑기방이다. 인형 등을 뽑는 크레인게임물을 모아둔 뽑기방의 경우 지난해 유동인구 많은 곳을 중심으로 빠르게 늘었다. 게임물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15년 전국에 21곳에 불과했던 뽑기방은 지난해 500곳으로 증가했다. 게임물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이전에는 오락실이나 슈퍼마켓 앞에 뽑기 기계 한두 대 두는 게 전부였는데 지난해에는 영업소 형태의 ‘뽑기방’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코인노래방의 증가세도 무섭다. 주 이용자도 중·고등학생에서 전 연령대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직장인 이승현(27)씨도 일주일에 3번씩 코인노래방을 찾는다. 2000원이면 노래 6곡을 부를 수 있다는 비용상의 장점 때문이다. 이씨는 “몇 년 전에 비해 코인노래방이 크게 늘어난 건 경제 불황과 1인 가구 증가 때문인 것 같다”고 추측했다.
작은집, 저가형 가구 등이 인기를 얻으며 ‘미니멀라이프’를 선호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불필요하게 공간을 차지하는 물건을 버리고 꼭 필요한 것들만 구매하는 식이다. 금융프리랜서 김나연(27·여)씨도 2015년 말 물건에 치여 사는 느낌이 싫어 미니멀라이프에 입문했다. 옷장과 냉장고, 방에 있는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면서 물욕도 줄고 쟁여놓는 식재료도 적어졌다. 김씨는 “미니멀라이프를 하면서 소유하는 물건은 줄었지만 삶에 대한 만족도는 더 커졌다”고 자부했다. ‘처음 시작하는 미니멀라이프'의 저자 선혜림씨도 “함부로 제품을 구매하지 않으니 그만큼 다양한 추억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선택지가 늘었다”며 “자연스레 조금 더 자신을 위한 생산적인 생각에 집중하게 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모습이 경제·심리적으로 팍팍해진 사회를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술 한잔 먹더라도 모여서 먹으면 돈이 많이 든다”며 “모였을 때 드는 비용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편의점 도시락, 코인노래방 등이 유행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뽑기방이 우후죽순 늘어난 데 대해서도 “불황기에는 적은 돈으로 즐길 수 있는 유흥이 발달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인형뽑기방”이라며 “요행을 바라지 않고는 얻을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에서 도박적 심리도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불황이 낳은 유행’은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의 ‘부조화 패러다임’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김 교수에 따르면 부조화 패러다임은 ‘보편적인 일과에서 두 가지 중 하나를 내칠 순 없다고 여기는 것’을 뜻한다. 이 때문에 새로운 생활전략으로 삶을 조율해야 한다고 김 교수는 설명한다. 여가를 포기할 수 없으니 저렴하고 신속한 방법(뽑기방, 코인노래방)을 선택하고 외식하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편의점 도시락을 찾는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미니멀리즘의 일상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경제나 생활요건 같은 게 충족되지 않으니 가장 저렴한 형태로 표출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작은 오락거리를 추구하고 저렴한 외식을 하는 게 부조화시대에 최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이라고 말했다.
글=임주언 기자 eon@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
[기획] 여가는 뽑기방·외식은 편의점… 불황속 ‘웃픈 유행’
입력 2017-01-09 0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