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도 안심’이란 문구를 추가하면서도 안전성 실험은 없었습니다.”
6일 오전 10시30분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형사합의28부 재판장 최창영 부장판사가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1심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권미애(41·여)씨는 코에 호흡보조기를 꽂고 있는 아들 임성준(14)군의 손을 말없이 움켜쥐었다. 시선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신현우(69) 전 옥시레킷벤키저(옥시) 대표를 향했다. 신 전 대표의 얼굴은 화석처럼 굳어있었다.
법원은 이날 신 전 대표에게 징역 7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옥시 관계자들에게도 각각 징역 5∼7년을 선고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홈플러스 직원들과 노병용 전 본부장 등 롯데마트 임원들에게도 각각 징역 5년과 금고 3∼4년을 선고했다. 재판에 넘겨진 19명 중 존 리(49) 전 옥시 대표 등 2명만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최 부장판사는 “신 전 대표 등에게는 징역 7년, 노 전 본부장 등에게는 금고 5년이 선고할 수 있는 법정 최고형”이라고 말했다. 신 전 대표 등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면서 최고 형량이 7년으로 줄었다. 재판부는 “신 전 대표가 가습기 살균제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비자를 기망해 제품을 판매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법리적으로 사기죄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피해자에 대한 공소시효도 일부 만료됐다고 봤다. 최 부장판사는 “2009년 6월 이전 사망하거나 다친 1·2차 판정 피해자와 2009년 10월 이전의 3차 피해자들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상죄는 공소시효가 만료됐다”고 말했다. 이 부분을 낭독하던 최 부장판사의 입에서 순간 ‘하’라는 탄식이 터졌다. 방청석에 앉아있던 피해자 가족들 틈에서도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어 리 전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객관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최 부장판사는 “리 전 대표가 재직하던 기간에 만들어진 가습기 살균제로 상당수 피해자들이 사망에 이르거나 상해를 입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면서도 “그와 직접적인 보고 관계에 있던 거라브 제인 등 전직 외국인 임원들에 대한 검찰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범죄 증명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선고가 끝난 뒤에도 법원을 떠나지 못했다. 권씨는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떳떳하게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산 죄밖에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물건을 샀는데 아무런 보호도 못 받으면 우린 어디 가서 살아야 하나요….” 1급 피해자 홍향란씨는 “내 폐를 엉망으로 만든 존 리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며 “가해 기업이 제대로 된 죄를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토로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도 중요하지만 우리 같은 피해자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계속 지켜봐 달라”며 “이것이 국민 여러분 자신과 가족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주시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검찰 관계자는 이날 “리 전 대표 등의 판결에 대해 항소할 방침”이라며 “거라브 제인 등 소환에 응하지 않는 외국인 임원들에 대해 범죄인 인도 절차를 밟고 있다”고 밝혔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100명 넘게 숨졌는데 무죄라니”… 피해자들 분노·오열
입력 2017-01-07 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