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꽃’은 1급이다. 100만 공무원 중 1급 고위공무원은 0.1%인 1000여명뿐이다. 장·차관은 대통령 임명직이니 1급은 공무원이 자기 실력을 발휘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다.
산업통상자원부 A실장은 지난해 3월 1급으로 승진했다. 산업부 내 행시 동기 중 가장 빨랐고 몇몇 선배도 제쳤다. 그런 그가 새해가 밝자마자 명예퇴직했다. 정년이 10년 가까이 남았고 기업체 이직 등 제2의 인생을 준비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무엇이 그를 ‘명예로운’ 퇴장으로 이끌었을까. 산업부 공무원 중 이 질문의 답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다들 침묵한다. A실장이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병가(病暇)를 냈고, 건강상 이유로 명퇴했다는 게 산업부의 공식 입장이다.
공공연한 진실은 따로 있다. A실장은 지난해 11월 초 주형환 산업부 장관 주재 내부 회의에 참석한 직후 사표를 냈다. 회의 자리에서는 주 장관과 A실장을 포함한 간부진이 의견 차이를 보였다. 주 장관은 자신의 의견이 계속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에게 폭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장관의 의중대로 정책방향은 결정됐지만, A실장은 청렴결백하게 수십년 일해 왔다는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공직을 떠났다.
주 장관의 별명은 ‘불도저’다. 기획재정부 차관 시절 한번 맡은 업무는 끝까지 밀어붙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러나 대다수 공무원들은 그를 ‘주님’이라 칭한다. 신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업무를 처리한다는 것을 빗댄 말이다. 일주일 뒤면 주 장관 취임 1주년이 돌아온다. 그러나 불도저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성과는 초라하다. 산업 구조조정은 지지부진했고, 수출은 고꾸라졌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인한 대중 통상 마찰 등 풀어야 할 숙제도 산더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본인 의도와 달리 ‘일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산업부 출신 한 원로는 “산업부는 명확하게 맡은 규제와 정책수단이 없기 때문에 국·과장들이 ‘사고’를 쳐서 일을 만들어야 돌아가는 구조다. 그런데 후배들을 만나보니 일주일 동안 장관 얼굴을 안 보면 행복하다고 하더라”고 한탄했다.
산업부 내에서도 장관 혼자 뛴 예견된 실패라는 얘기가 나온다. 산업부는 전통적으로 개성이 강하고 적극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과거 재무부(현 기재부)가 ‘파워풀(powerful)’했다면 상공부는 ‘컬러풀(colorful)’했다. 그런데 지금은 시키는 일도 서로 떠넘기는 풍토가 만연해졌다. 혹시 장관 말이 바뀔까 싶어 보고나 통화 시 녹취를 하는 간부도 생겼다. 주 장관 취임 이후 인사상 혜택을 봤다는 소문이 도는 한 간부는 송년회에서 아부성 폭탄사를 외쳤다고 한다. 몇몇 사무관은 이런 간부들을 기록해놓는 ‘살생부’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도 돈다. 이러니 일이 될 리가 없다.
결론적으로 지난 1년간 주 장관의 불도저 카리스마는 빛을 보지 못했다. 산업부 안팎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외침이 계속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장관 한 명의 카리스마가 통하는 ‘원맨쇼’ 시대는 지났다. 주 장관에게 필요한 건 호통이 아니라 소통의 마인드다. 물론 산업부 구성원들도 언젠가 떠날 기재부 출신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장관과 시선을 맞춰야 한다. 지금 우리 경제는 장관과 구성원들이 호흡을 맞춰 일하기를 기다려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 ‘주형환의 산업부’가 변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이성규 경제부 차장 zhibago@kmib.co.kr
[세상만사-이성규] 어느 1급 공직자의 명퇴
입력 2017-01-05 17:38 수정 2017-01-05 2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