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무작정 안에 작정이 있다

입력 2017-01-05 18:18

내게는 멋진 후배가 하나 있다. 3000년 전 선사시대를 생생하게 되살려낸 소설을 썼던 그녀는, 어느 날 무작정 두 아들을 학교에서 거둬들여 집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하나님 말씀 위에서 키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자연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무작정 다른 아이들도 받아들였다. 살던 집은 야금야금 홈스쿨에서 기독교 대안학교로 발전했다. 아이들이 늘어나 집이 터져나갈 지경이 될 무렵, 그녀는 무작정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무작정 공사를 벌였다.

도대체 계산이 안 되고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힘 닿는 대로 돕겠다는 손길도 있었지만 그런 손길만으로는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저렇게 무작정 일을 벌여서 어쩌려는 것일까.

놀랍게도, 일은 마무리되었다. 고비마다 기적처럼 딱 필요한 만큼 부족한 게 채워지곤 했다. 그리고 이제는 산돌자연학교라는 예쁜 이름의 건물이 오똑 서있게 되었다. 최신 빌딩과 아파트가 늘어선 새도시 한켠, 졸졸거리는 개울을 따라가다가 달캉거리는 바닥의 어두운 토끼굴을 지나면 노랑과 연두와 주황색 무늬가 산뜻한 하얀 이층집이 환하게 나타난다. 그걸 보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얼마 전 눈이 펑펑 내린 날 아이들은 운동장을 뛰고 구르며 웃고 소리쳤다. 이제 봄이 되면 애들은 씨를 뿌리겠지. 가을이면 고구마랑 감자를 캐고 자전거 여행도 떠나겠지.

학교가 지어진 과정을 돌아보면서 나는 그녀의 ‘무작정’을 생각했다. 그게 우리 눈에는 무작정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그 안에 어떤 작정이 들어 있었던 거다. 눈에 띄지도 않을 작은 씨앗 속에 커다란 잎과 예쁜 꽃과 풍성한 열매가 들어 있는 것처럼. 그녀는 그 보이지 않는 작정을 찾아내어 무수한 흔들림 속에서도 놓지 않고 지켜낸 거다. 나 나름대로 무작정 뭔가 일을 저지른 올 한 해의 시작에 그녀는 내게 큰 귀감이 된다. 그 안의 작정을 믿고 따라갈 작정이다.

글=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