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칼과 학] 시대 가르는 칼과 세상 품으려는 예술의 암투

입력 2017-01-05 17:29
중국 기술을 수용한 비색청자가 고려 독자 개발의 상감청자(무늬를 상감기법으로 새긴 것)로 넘어가는 시기는 문인 정권에서 무인 정권으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정범종(사진) 작가의 장편 ‘칼과 학’(은행나무)은 고려청자라는 고전적 소재를 취하면서도 ‘도공의 예술혼’식 고답적 주제를 탈피해 시대사를 녹여낸 격동의 시적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칼과 학’은 문인과 무인의 갈등을 시대적 배경 삼아 상감기법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이를 억압하려는 지배계급과 예술의 혼을 담아 평화를 기원하는 천민계급의 첨예한 대결을 다룬다. 시대를 가르는 칼과 세상을 품으려는 예술의 암투다.

왕의 다회를 준비하던 관료 주상우는 탐진(강진)에서 개경으로 납품된 청자 상자에서 상감청자 1점이 섞인 걸 발견한다. 왕실에서는 무늬가 없는 비색청자만 써왔다. 무늬를 새기는 건 왕에 대한 모욕처럼 위험한 일이다.

상부로부터 상감청자를 제작한 도공을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은 주상우는 칼잡이 동생 주상모에게 일을 맡기고, 강진의 청자 도공 출신으로 궁궐에서 청자 감별관 벼슬을 하던 청허를 동행케 했다. 청허는 문제의 도공이 제자 윤누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비밀에 부친다. 오히려 제자를 개경으로 데려온다.

“비색 청자 찻잔들을 상자에 담을 때 하나를 상감청자 찻잔과 몰래 바꿔치기했지요.” “그 연유를 알고 싶다.” “고려에만 있는 상감청자를 왕께서 알아야 한다고 진즉부터 생각했어요. 개경의 대신과 백성도 알아야 하고요.”(47쪽)

조정에서는 논란 끝에 상감청자가 채택되고 윤누리는 개경으로 올라와 상감청자의 감별관이 되어 출세하게 되는데….

무신의 난이 일어나며 관계가 역전되는 주상우 주상모 형제, 성공에 잠시 눈멀었던 윤누리의 좌천 등 스토리 상상력이 돋보인다. 남성 캐릭터들이 피 냄새 진동하는 권력과 부의 쟁탈전을 벌이는 것과 달리, 여성 등장인물들은 평화와 공동선의 수호자로 나온다. 윤누리의 어머니와 아내 다물이 그렇다. 이들은 모두 ‘내가 아니라 우리’를 이야기한다.

전쟁과 칼의 시대에 평화는 어떻게 올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울림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제4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유일 것이다. 이 상은 4·3정신을 계승해 평화에 대한 전형성을 보여주는 작품에 주어진다.

다소 아쉬운 건 한반도에서의 청자 탄생 시기를 폐기된 이론인 신라말기로 보는 등 학계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점이다. 10년 이상 공들여 쓴 격조 있는 문장이 돋보이지만 서사의 속도감은 다소 떨어진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