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라동철] 촛불시민의 진화

입력 2017-01-04 17:38

병신년의 늦가을과 겨울은 뜨거웠다. 최순실 게이트가 열리고 배후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너도나도 촛불을 높이 들었다. 공사(公私)를 구분 못하고 대통령의 책무를 팽개치고도 남 탓으로 속을 뒤집어놓는 박 대통령에게 국민들은 절망하며 등을 돌렸다. 서면보고와 레이저빔이 상징하는 불통·권위주의 통치방식과 콘크리트 지지층에 의존했던 제왕적 권력은 촛불 앞에서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지난 2개월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과 부패한 지배층의 민낯이 고스란히 까발려진 시간이었다. 동시에 불의에 맞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민초들의 건강성을 재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 이후 청와대 관저에 유폐된 대통령이 새해 벽두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구구절절 변명과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탄핵열차는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공직사회마저 탄핵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촛불은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포한 증표다. 그것만으로도 자부할 만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촛불은 이벤트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 새로운 시대를 여는 추동력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광화문 1000만의 평화로운 촛불집회, 그것으로 끝이라면 너무 허탈하지 않나.

새 시대는 어떻게 열어야 할까. 새 출발은 응분의 책임을 묻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특검 수사, 국회 국정조사특위 활동 등을 통해 밝혀진 국정농단, 헌정유린, 정경유착의 공범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해 일벌백계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또 그랬다가는 정말 끝장’이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줘야 이런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는다.

국민을 섬기는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도 과제다. 박근혜정부 출범은 지역주의, 세대갈등, 실체도 불분명한 막연한 이념이 가른 ‘묻지마 투표’의 결과물이다. 다음 선거에서 이런 실패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외치는 후보와 세력들은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공정한 룰에 따라 국민의 선택을 기다려야 한다. 촛불집회는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는 정치 교육장이었다. 정치는 딴 세계가 아니라 나와 관련이 있고 나의 참여로 바뀔 수 있다는 걸 이번에 느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경험이 유권자로서의 자각으로까지 이어질 때 비로소 국민이 주인인 세상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새로운 민주헌정 질서를 구축하는 것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켜 입법·사법·행정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선거의 룰도 바꿔야 한다. 결선투표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중대선거구제 등 다양한 방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거대한 촛불에는 ‘자격 없고,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은 물러나라’는 요구와 불평등·양극화를 완화하고 서민들이 어깨를 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담겨 있다. 이에 대한 해법도 모색해야 한다.

‘정치권력의 시녀’란 비판을 받아 온 검찰에 대한 견제 장치도 필요하다. 검찰 인사의 독립성 강화, 검사 청와대 파견 금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본격화될 조기 대권 레이스가 이전투구판이 돼 이런 시대적 과제가 표류해서는 안 된다. 정치권에만 맡겨서는 백년하청이 되기 쉽다. 시민들의 지속적인 견제와 감시가 필요하다. 새 시대는 촛불시민들이 ‘행동하는 양심’ ‘깨어 있는 시민’으로 진화할 때 비로소 열릴 수 있다.

라동철 사회2부 선임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