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 ‘문화계 블랙리스트’ 피해 범위 파악 착수

입력 2017-01-04 04:55
경남 통영에 위치한 윤이상기념관 내부 전시실 입구에 놓인 방명록에 ‘음악은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 이데올로기와도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쓰여 있다(왼쪽 사진). 최근 논란이 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는 윤이상평화재단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홍성담 작가의 대형벽화 ‘세월오월’(오른쪽 사진)도 광주정신전 전시작으로 선정됐다가 철거됐다. 곽경근 선임기자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구체적 작동방식을 파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윤이상평화재단 등 박근혜정부 들어 각종 정책적 지원에서 배제된 예술인들의 피해 범위와 진상을 우선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검은 관련 문화예술 단체로부터 자료를 제출받아 검토에 들어갔다. 사례를 살펴보며 리스트 생산·적용에 개입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직권남용 등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부 고위층의 혐의를 조합해 간다는 방침이다.

박근혜정부가 불온 콘텐츠라는 딱지를 붙여 리스트에 올린 대표적인 문화단체는 2005년 3월 설립된 윤이상평화재단이다. 남북 이념대결의 극복을 기원했던 세계적 작곡가 고(故) 윤이상 선생은 박정희정권 당시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는 동백림 사건을 단순 대북접촉에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한 사건으로 결론냈다.

과거사위 판단 이후에도 현 정부에서는 윤이상 옥죄기가 계속됐다. 홀수 년마다 시상해 온 국제윤이상작곡상이 대표적이다. 윤이상평화재단 관계자는 3일 “매년 받아오던 정부지원금이 이번 정부가 들어선 2013년부터 끊겼다”고 말했다. 2억원가량의 지원금이 끊기면서 2011년 4회를 마지막으로 윤이상작곡상은 개최되지 못했다. 독일 한국문화원에 있던 윤이상 관련 자료는 치워졌다.

광주비엔날레가 2014년 9∼11월 개최한 광주정신전에 홍성담 작가의 대형벽화 ‘세월오월’이 전시작으로 선정됐다가 철회된 배경도 특검의 수사선상에 올랐다. 세월오월은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풍자한 걸개그림이다. 특검은 광주비엔날레에 작가선정 및 작품제작 과정, 예산지원 내역 등 관련 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최근 개봉한 원전재난 영화 ‘판도라’와 연극 ‘짬뽕’ 등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판도라는 영화 ‘변호인’의 투자배급사였던 NEW가 투자배급했고, 짬뽕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특검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인을 지원에서 배제하려는 청와대의 압력이 문체부 담당 부서를 통해 광범위하게 전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세월오월의 경우 김종 전 문체부 2차관이 윤장현 광주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작품전시 철회를 압박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블랙리스트 작성의 정점으로 지목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직접 홍 작가의 그림을 전시회에서 배제할 것을 지시한 정황도 김영한 전 민정수석 비망록에 적혀 있다. 특검은 이와 관련해 2일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전임자 김 전 실장 시절 작성·관리된 블랙리스트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관리됐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현 유동훈 문체부 2차관도 이날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시인 김소월의 삶을 다룬 낭독음악극 ‘소월산천’은 국립국악원 공연담당 실무진이 상부의 지시를 받고 외압을 행사한 경우다. 국악연주단체인 앙상블시나위를 주축으로 기타리스트 정재일, 연출가 박근형이 협업한 공연으로 주목받았지만 국립국악원은 예정된 공연을 취소했다. 당시 실무진은 박 연출가와의 협업을 배제해 줄 것을 앙상블시나위 측에 요구했다고 한다. 박 연출가가 2013년 박정희·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개구리’라는 작품에 참여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기 때문으로 문화예술계는 본다. 특검은 최근 국립국악원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당시 국악원 기획운영단장이던 용호성 주영국 한국문화원장을 불러 조사했다.

황인호 정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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