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준동] 헌재 대심판정

입력 2017-01-03 17:52

헌법재판소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4·19혁명으로 이뤄진 3차 헌법 개정 때다. 하지만 5·16쿠데타로 구성 일보 직전에 사라지고 만다. 그 후 27년이 흐른 1988년 헌재는 역사적인 탄생을 알리게 된다. 6·10항쟁의 산물이었다. 헌재가 지금의 재동(서울 종로구)에 자리 잡은 시기는 1993년이다. 조선 말기 좌의정을 지낸 박규수의 저택이었고, 다시 국내 최초의 서양식 종합병원인 광혜원이 자리했다가, 그 후 경기여고, 창덕여고가 있었던 곳이다. 울타리 옆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집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천연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수령 600년이 넘는 백송이 우뚝 솟아있다. 모양은 보통 소나무와 비슷한데 나무껍질 색이 희다.

청사 내에는 대심판정과 소심판정이 있는데 소심판정은 40석 규모, 대심판정은 112석 규모의 방청석을 갖추고 있다. 대심판정은 한옥의 기둥과 서까래, 방문 디자인을 접목한 전통미가 돋보인다. 재판관석 맞은편에는 희망과 미래를 상징하는 ‘10개의 빛의 계단’이라는 고(故) 하동철 화백의 작품이 벽면에 설치돼 있다. 9명의 재판관은 60㎝ 높이의 심판대 위에 놓인 42㎝ 높이의 의자에 앉아 방청석을 정면으로 내려다본다.

대심판정에선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과 신행정수도 특별법 헌법 소원, 2010년 유신헌법 시절 대통령 긴급조치 헌법 소원,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등 우리 현대사에서 주목한 중대 사건의 변론과 결정 선고가 이뤄졌다. 역사의 현장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첫 공개변론이 3일 오후 2시 이곳에서 열렸다. 13년 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1차 변론 때처럼 대통령이 출석하지 않아 9분 만에 종료됐지만 분위기는 무겁고 엄숙했다고 한다. 대심판정에서 두 차례나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된 것은 우리 역사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불행이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되겠다.

글=김준동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