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진(73) 서울대 명예교수는 언젠가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의 학문 노정을 ‘사해불퇴주(史海不退舟)’라는 문구로 소개했다. 직역하자면 ‘사료(史料)의 바다에서 물러서지 않는 배’를 뜻하는데, 여기에는 이 교수의 삶이 오롯이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사료에 파묻혀 사실과 직관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통념을 뛰어넘는 새 역사관의 세계를 직조해 왔다.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테이블에 놓인 A4용지들이었다. 종이에는 인터뷰를 앞두고 그가 준비한 각종 데이터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 교수는 대화가 시작되자 휴대전화 녹음 버튼부터 눌렀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는 걸 짐작케 했다.
인터뷰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작됐다. “지금은 굉장히 큰 변혁이 예상되는 시기”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다음은 이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
-국정농단 사태로 두 달 넘게 ‘촛불’이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를 앞두고 나도 현장에 가봤다. 인상적인 건 시위의 ‘질서’였다. 이렇게 질서가 잘 지켜진 시위는 전례가 없었다. 이유가 뭘까 생각했는데, 한국인의 높은 교육 수준 때문일 것 같았다. 찾아보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3개국을 상대로 이런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더라. 내용은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교육 수준을 비교한 것이었다. 한국의 경우 ‘부모보다 내 학력이 높다’고 응답한 비율이 96%에 달했다. 러시아가 그다음인데 59% 수준이다. 국민 다수가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것, 여기에서 새로운 문화와 질서가 생겨났고 이것이 지금 같은 시위를 가능케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위 참가자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는 분노일까 해방감일까.
“두 감정이 모두 섞여 있을 거다. 한국인은 정의에 대한 관심이 특별한 민족이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저작 ‘정의란 무엇인가’는 미국에서는 10만부 팔렸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00만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우리나라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건 한국인이 불의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거다.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번 사태는 어처구니없는 일 아닌가.”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논평을 듣고 싶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은 소위 경제개발 세력과 민주화 세력,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이 구도가 깨지고 있다. 균열은 이미 지난 총선부터 시작됐다. 경제개발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각각 상징하는 정당이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총선 당시 비박과 친박 사이의 갈등이 엄청났고, 야당은 분당이 돼 국민의당이 탄생했다. 소위 보수와 진보 진영에서 각각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기존 구도로는 더 이상 민심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 현상이었다. 부정 청탁을 금지하는 이른바 ‘김영란법’이 시행된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김영란법 시행은 어떤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김영란법은 1960년대 중반 경제개발이 가속화된 이후 구성원들이 묵인한 관행들을 ‘스톱’시키자는 것이다. 이 법이 지금 등장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한국사회의 법적 기틀을 새롭게 만들자는 뜻이 담겼다고 본다. 우리나라 1인당 GDP는 수년째 2만7000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다. 3만 달러 고지를 못 밟는 건 경제 외적인 부분, 한국인의 잘못된 의식 탓이 아닐까 싶다.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당한 관행들, 그런 것들을 없애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나갈 시점이다.”
-우리 역사에서 국정농단 사태와 유사한 전례가 있을까.
“19세기에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이뤄진)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있었지만 그것은 국가의 통치구조 안에서 이뤄졌다. 통치구조 ‘바깥’에 다른 조직을 만든 게 아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바깥에서 사적 조직이 운영된 거다. 이런 전례가 없다. 국가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한 일탈이다. ‘촛불’을 보면서 가장 떠오른 임금은 정조(1752∼1800)였다. 박 대통령과 비교되는 측면이 있어서다.”
-정조의 어떤 점을 말하는지.
“박 대통령의 아버지 어머니가 비명(非命)에 세상을 떠났듯이, 정조 역시 비슷한 비극을 겪었다. 할아버지(영조)의 명령에 따라 아버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으니까. 이런 일은 개인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다. 그런데 정조가 훗날 보여준 모습은 박 대통령과 달랐다. 대민(大民)인 사대부만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았고, 소민(小民)을 보호하기 위한 일에도 적극 나섰다. 백성을 만나려고 선왕의 능을 보러간다는 명분을 내세워 궁 밖에도 자주 나갔다. 박 대통령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우리사회 선결 과제를 꼽자면.
“서양의 공화제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서적을 한 권 읽었는데 거기 재밌는 얘기가 나오더라. 공화주의가 완성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거다. 첫째는 유머이고 둘째는 엄밀성, 즉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내용이었다. 유머를 첫째 조건으로 꼽은 걸 뜻밖으로 여길 수 있는데, 상대와 협상을 해야 하는 정치인이라면 유머를 갖춰야 한다. 우리사회에는 ‘나만 옳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대척적인 관계만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자기주장이 없다는 거다. 저마다 자기주장이 있다면 어느 지점에서는 뜻이 같은 부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기주장이 없으니 대결만 계속되는 거다.”
-이명박·박근혜정부의 집권 기간, 역사가 퇴보했다고 보는가.
“이명박정부는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정부 역시 그 연장선에서 (성과가) 더 있을 거라고 봤다. 하지만 1년쯤 지나면서 기대와는 다른 쪽으로 가더라. (인사가 있을 때면) 모르는 사람이 툭툭 튀어나오고, 그러면서 ‘이거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순실 게이트로 보수 진영의 약점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야당이 내놓는 비판 역시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른바 새롭게 만들어질 제3지대에 주목하고 있다. 정치권은 ‘촛불’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대선을 앞두고 있다. 다음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 시작된 변혁의 과정이 다음 대통령을 뽑는 선에서 마무리되진 않을 것이다. 새 지도자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틀을 만들지는 몇 년이 걸릴 문제다. 다음 대통령은 ‘촛불 민심’을 달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짊어져야 할 짐이 무겁다. 지도자는 겸손해야 한다. 조선의 유교정치에서 강조한 건 겸양의 덕이다. 안중근(1879∼1910)도 한국인의 ‘교만의 병’을 지적하곤 했다. 자신의 허물을 알아야 한다. 지금과 같은 멘털리티(사고방식)로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없다.”
이태진 교수는
국사학계의 거목으로 통한다.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나왔다. 77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2009년까지 가르쳤다.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훔쳐간 전말을 세상에 알렸고, 일제강점의 근거가 된 조약들이 위조문서에 근거를 뒀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미국 하버드대, 일본 도쿄대 등지에서도 한국사를 강의했다. 2010∼2013년에는 국사편찬위원장을 맡았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사회사연구’ ‘조선유교사회사론’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등이 있다.
글=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사진=구성찬 기자
[지성에 한국의 길을 묻다] <2> “변혁의 시기… 우리 사회 새로운 틀 만들어나갈 때”
입력 2017-01-05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