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머리 감는 시간

입력 2017-01-03 17:36

때로는 어떤 행위나 공간에 나를 위탁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것도 기꺼이, 말이다. 이를테면 내게는 머리 감는 시간이 그렇다. 언제부턴가 내가 “이건 머리 감다가 생각난 건데”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를 감다보면 별 게 다 떠올랐다. 술김에 누락되었던 기억부터,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생각나지 않아 답답했던 고유명사, 깜빡 잊고 지나칠 뻔했던 대소사까지. 머리 감기는 단지 두피와 모발의 노폐물 제거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건 풀리지 않던 소설의 실마리나 매혹적인 단상이 불쑥 솟아오르는 경우였다.

머리 감기의 새 효용을 알게 된 후, 나는 욕실에 종이와 펜을 두었다. 우주와 욕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스페이스펜을! 더 이상 생쥐나 유성우처럼 순식간에 스치는 생각을 잡기 위해 욕실 밖으로 뛰쳐나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방금 떠올린 단상이 증발할까봐 문장을 웅얼대거나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펜을 잡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샴푸용 장갑부터 두피에 산소를 공급하는 팩, 스팀헤어캡도 들여왔다. 보다 활달한 자극을 통해 많은 영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첨단 장비랄까. 양손에 샴푸용 장갑을 낄 때는 거의 수술 직전의 의사가 된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시스템을 완비하자 머리 감기가 그저 두피와 모발의 노폐물 제거로 끝나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런 준비가 창조적 영감을 대량생산하려는 욕심처럼 느껴졌나? 영감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 시간마저 자기계발이나 자기치유의 한 방편으로 활용하려는 건 불순한 의도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다시 원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머리를 감는 것이다. 진짜 오롯이 나를 그 행위에 위탁한다는 마음으로. 그러다보면 욕실을 뛰쳐나와 뭔가를 급히 적어대는 상황이 오고야 만다. 이때의 기록은 메모라기보다는 크로키에 가깝다. 내가 방심할 때만 찾아오는 유레카의 흔적이다.

글=윤고은(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