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섬의 목사님이 인공 무릎관절 수술을 기도제목으로 내놓았습니다. 선교회는 모금에 나섰고 곧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어떤 분이 경남 창원에 오면 무료수술을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섬 목사님은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여수애양병원을 희망했습니다. 여수애양병원에 인공관절수술 명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서울 강남에 있는 한 정형외과에서도 무료수술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도 그 목사님은 싫다고 했습니다.
저는 화가 났습니다.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땐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분이 수술비 300만원 중 100만원을 기부하겠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화를 내고 있는 저를 용서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섬 목사님이 여수애양병원에서 수술을 분명히 받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섬 목사님도 용서하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신다는 것은 이미 우리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함을 받았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고 일하십니다. 용서는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영광스러운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용서란 우리 죄를 바로잡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품을 가진 자로 만들어 가시려는 주님의 열심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할 줄 알고 그 죄와 부단히 싸우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누군가를 용서하는 행위에는 그의 죄를 용납해 끊임없이 그가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섬기는 과정이 동반돼야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가 만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수는 성공이나 신비적 체험, 경건 등의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용서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용서에 기초한 연합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경건하고 더 순종했기에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와 연합됐기에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경건과 윤리의 선함이 나온다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의 깊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성공 안에 누군가를 구속(救贖)하기 위한 용서의 흔적이 없다면 그 성공은 자랑만 됩니다. 용서란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하나님 앞에서 깨닫고 자신의 육신으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사회는 용서라는 단어를 잃어버렸습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 가운데 정직하게 국민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이를 보는 것이 드문 세상이 됐습니다. 더 불행한 것은 저 같은 목회자나 신자 중에도 드러난 죄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깊이가 사라진 교회는 세상을 구속할 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구속의 능력은 용서로부터만 나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완전수 7과 10을 사용하셔서 일곱 번씩 일흔 번씩 영원히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영원한 교회의 단어입니다. 새해에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단어는 용서입니다.
박원희 목사 (낙도선교회 대표)
[오늘의 설교] 교회가 회복해야할 단어 ‘용서’
입력 2017-01-02 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