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개헌 카드’를 띄우며 본격적인 차기 대권 행보에 나섰다. 국내 정치 기반이 약한 반 전 총장이 개헌을 고리로 세 규합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임기 단축을 전제로 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거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반 전 총장은 3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현행 헌법은 1987년 개정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우리가 몸은 많이 컸는데 옷은 안 맞는 상황”이라며 “필요한 부분은 개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엔 사무총장으로 마지막 출근한 날 반 전 총장은 개헌 입장을 묻는 한국 특파원단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이어 “(개헌의) 구체적인 방향에 대한 개인 생각은 서울에 가서 말하겠다”고 덧붙였다.
반 전 총장의 개헌 언급은 여야의 개헌파를 한데 모으려는 전략이다. 개혁보수신당(가칭) 김무성 의원과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 개헌 지지세력의 공감대를 확보하고, 개헌을 매개로 이른바 ‘보수·중도 대통합’을 만들자는 것이다. 개헌에 반대하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를 고립시키기 위한 ‘반문(반문재인) 연대’ 성격도 강하다.
정치권에선 반 전 총장이 2022년까지 5년 임기를 채우지 않고 2020년 4월 21대 총선에 맞춰 물러난다는 임기 단축 대선 공약을 선언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흘러나온다. 임기 중 개헌을 통해 대선·총선을 2020년 동시에 치른다는 얘기다. 하지만 반 전 총장 측은 “여러 아이템이 논의 중이지만 아직 구체화된 단계는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반 전 총장은 대권 도전 의지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한국 국민들에게 보내는 신년사’에서 “우리 사회의 적폐를 확 바꿔서 새로운 도약을 해야 한다”며 “거대한 변화와 통합을 이끌 제대로 된 지도자를 뽑고 싶다는 국민 염원이 어느 때보다 크다는 것을 해외에서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23만 달러 수수 의혹에 대해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며 “검증을 빙자해 괴담을 유포하거나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은 근절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 전 총장은 1일 오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에게 각각 전화해 새해 인사를 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의 통화에서 “새해에 더욱 건강하시라”고 했고, 이 여사는 “한국에 오셔서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란다”고 화답했다. 이 여사에게 전화기를 넘겨받아 잠시 통화한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은 “반 전 총장이 대권에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고 전했다.
반 전 총장은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에게 “봉하마을에 오시는 분들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권 여사는 “건강한 모습으로 (임기를) 잘 마쳤으니 국내에 잘 들어오시라”고 했다.
반 전 총장의 지역 기반인 충청권은 들썩이고 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최근 새누리당 한 충청권 의원을 만나 “그만한 사람이 없다. 세계적인 눈도 다 갖춘 훌륭한 분”이라며 반 전 총장을 치켜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반 전 총장은 1월 중순 귀국 전까지 국외에 머물며 대권 구상을 구체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임기 마지막 날인 31일 밤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광장에서 열린 새해맞이 행사(크리스털 볼 드롭)에 초청돼 새해를 알리는 60초 카운트다운 버튼을 눌렀다.
김경택 기자,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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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지대 모으고 문재인 따돌리고… ‘개헌카드’ 띄우는 반기문
입력 2017-01-02 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