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공감하는 그리스도인

입력 2016-12-30 20:17

지난 7월에 보도된 한 신문기사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에 대해 설문 조사를 했는데, 우리나라는 35개 회원국 중 꼴찌였습니다. 우리 국민 72.4%가 ‘있다’고 답했는데, OECD 평균(88%)에 비하면 현저히 낮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보다 경조사를 잘 챙기고 학연과 지연을 중시하며 계나 동아리도 많고, 커피숍은 늘 붐비는데, 왜 그럴까요. 공감이 없는 피상적인 인간관계이기에 정작 어려울 땐 기댈 만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 관계망이 부실하면 불안하게 살 수밖에 없고 사회통합은 불가능합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는 신분의식이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경제력 학력 외모 지역 지위에 따른 차별이 극심합니다. 금수저, 흙수저, ‘헬(hell·지옥) 조선’이란 말이 현실이지 않습니까. 도움을 받기는커녕 신분 차별이 심해지니, 제각기 살 길을 도모하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공감하며 더불어 살지 않으면 사회는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감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니라’는 예수님의 ‘3중(重)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3중 사역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본문의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단어에 사역의 동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동정의 차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으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스프랑크니조마이’로 ‘애간장이 끊어지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컴패션(compassion)’으로 번역되는데 ‘고통에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남의 고통에 자신을 밀어 넣어(empathy) 자신도 애간장이 끊어지는 고통스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병, 가난, 소외, 억압으로 겪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공감하신 까닭에 3중 사역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공감어린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저명한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저서 ‘마음의 진보’에서 “공감이 종교의 본질이고 공감은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는 “인공지능시대에는 타인을 공감하고 갈등을 조정하면서 협력하는 사회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인데, 하나가 망하면 다른 하나도 같이 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통당하는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사회는 허물어지고 맙니다.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양극화 빈곤 자살 청년실업 실직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깊은 병에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현존인 교회와 주님을 따르려는 우리가 병고와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연대한다면 우리 사회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새해에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공감하는 존재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나아가 가난한 이들의 기댈 언덕이 되고, 교회가 사회안전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 해를 은혜롭게 마감하시길 바랍니다.

이근복 목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약력=△성균관대 행정학과 △장신대 신대원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