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악계 원로가 제자 챙기면 알아서 높은 점수

입력 2016-12-29 17:44 수정 2016-12-30 00:29

참신한 국악인의 등용문이 돼야 할 국악경연대회가 대회 주최 측과 심사위원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정도로 비리가 만연한 것은 국악계의 뿌리 깊은 도제식 교육과 순혈주의, 비리를 알아도 서로 눈감아주는 온정주의 때문이다.

문하생은 밥·청소·빨래는 기본, 비서 노릇까지

“스승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림자도 밟지 못하는 게 국악인의 숙명입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청소와 빨래는 기본이고 집안 대소사와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국악인 김모(51)씨는 29일 “무릎 꿇고 판소리를 배우다가 회초리 맞는 날은 눈물도 제법 흘렸지만 수련 과정에 얽힌 추억도 적잖다”며 “과거에는 스승이 내준 방 한쪽에서 눈칫밥을 먹고 새우잠을 자면서 모셔왔지만 요즘은 출퇴근하는 문하생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신인 발굴을 위한 국악 경연대회의 고질적 금품 비리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국악계의 특성상 ‘도제식 교육’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특정 계파의 문하생이 스승을 모시고 숙식을 함께하면서 기량을 전수받아온 국악계 고유의 교육문화가 배경이라는 의미다.

판소리와 무용, 기악 등을 배우는 문하생들은 국악계 원로의 가르침을 받고 스승의 대를 이어 전통과 명맥을 지켜가고 있다. 자신이 모시는 스승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순혈주의가 자연스럽게 똬리를 틀게 하는 이유다. 독특한 순혈주의는 실력을 갖춘 신인들의 국악계 진출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손에 꼽히는 유명 국악계 원로가 직계 제자에게 상을 줄 것을 완곡하게 부탁하고 직접 심사위원석에 앉게 되면 그 권위와 기세에 눌린 다른 심사위원들이 알아서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이죠. 스승이 제자를 챙기고 싶다는데 거절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사전에 짜고 치는 판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대통령상 수상자로 수년 전 국악 경연대회를 창설한 이정기(가명·60)씨는 “사승관계(은사와 상좌 관계)로 얽힌 국악계 인사들은 유난히 정에 약하다”며 “보통 경연대회 심사위원이 7명으로 구성되는데 4명만 규합하면 결과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고 실토했다.

그동안 활동 영역이 좁은 국악계에서 스승과 제자가 심사위원과 출전자로 얼굴을 마주한 국악 경연대회 사례는 나열할 수 없을 만큼 흔하다. 본인이 가르쳐온 제자의 대통령상 수상 등 입신양명을 돕기 위해 제자가 출전한 대회의 심사위원장을 일부러 직접 맡기도 한다.

현재 전북 모 지자체 국악단체 사무국장인 Y씨의 경우 전남지역 국악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명창 반열에 올랐다. 국창으로 불리는 자신의 사부 조모(74)씨가 심사위원장을 맡아 후한 점수를 줬기 때문이다. 10여년 동안 모셨던 스승을 떠나 독립한 Y씨는 요즘도 국악계 거물인 조씨가 지방에 내려올 때마다 극진히 모시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의 제자를 뽑아줄 테니 당신도 내 후계자를 키워주시오’라는 식의 패거리 문화도 경연대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광주 북구에서 국악학원을 운영 중인 K씨(49)는 판소리를 배우다가 뒤 늦게 북, 장구를 치는 고수(鼓手)로 전환했지만 스승의 덕을 본 경우다. 역시 국악계 거물의 직계 제자인 K씨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스승의 후광에 힘입어 고수 분야 국악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최소한 25∼30년 경력의 고참 고수들이 50대 중후반 나이가 돼야 받던 상을 K씨가 이례적으로 받게 된 것은 스승의 막강한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정설로 통하고 있다. 여기에 스승의 체면을 살려주고 대부분 선배인 심사위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인사치레’ 명목의 금품수수가 끼어들어 경연대회의 금품 거래가 잦아지는 것이다.

“월급도 받지 않는 개인비서, 심하게 말하면 몸종이나 노예 대접도 얼마든지 감수해야 합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스승을 따라다니지 않으면 국악계에서 성장할 수 없는 풍토라고 보면 됩니다. 여자들은 식모 노릇에서 더 나아가 몸을 바치는 일도 더러 있다고 들었습니다.”

수상자 사전 선정·상금 돌려받기·로비까지

국악 경연대회는 판소리·무용·기악·민요 등 특정 분야 단일 대회와 출전자들이 4∼9개 부문에서 실력을 겨루는 종합대회로 나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장, 교육부장관, 문화재청장 등 명의로 250여개의 시상을 지원하고 있다.

수상자 사전 선정과 상금 돌려받기 등 수법과 비리 행태는 다양하다. ‘토끼 간’을 소재로 한 수궁가 사설(일명 아니리)을 빼먹어 예산 탈락이 당연한데 대통령상을 준 판소리 대회도 있다. 40여년 전통의 전주 모 대회는 올해 대통령상 수상자가 판소리 가사를 네 장단 누락해 동영상 공개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심사의 공정성 시비를 우려해서다.

대통령상이나 장관상 등을 가져오기 위해 국악계가 문체부 등을 상대로 치열한 로비를 벌이는 일도 다반사다. 대통령상의 경우 1000만원 안팎의 적잖은 상금이 내걸리지만 이보다 대통령상을 받게 되면 뒤따르는 ‘명창’이라는 국악계 최고의 명예를 갖기 위해 국악 경연대회 주최 측 관계자들은 인맥을 총동원하고 있다.

세종대왕 명칭을 사용하는 모 국악대회는 창설 이후 1년 만에 3개의 장관상을 끌어오는 저력을 발휘했다. 통상 장관상을 신청하고 시상 지원을 받는 데 5∼6년이 걸리던 관행이 깨지자 국악계에서는 “청와대와 든든한 배경이 동원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