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청구를 기각하려면, 5개의 돌로 된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비선실세의 인치(人治)주의, 기부 강요 등 권한남용, 언론자유 위배, 생명권 보장 조항 위배, 뇌물 수수 등 각종 형법 위반. 헌재가 정리한 이 5가지 탄핵청구 이유가 5개의 징검돌이다. 5가지 모두 대통령을 파면시킬 정도로 중대한 범죄가 아니거나 직무와 관련 없는 사생활이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헌법재판관 9명 중 4명 이상이 동의해야 탄핵청구가 기각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앞으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5가지 탄핵 사유와 같은 행위를 해도 괜찮다.
2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 열린우리당 후보의 당선을 바란다고 말해 탄핵소추됐지만 헌재가 기각했다. 그 뒤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때 자기 당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두 번째 근거는 헌재가 2015년 발간한 ‘헌법재판실무제요’ 제2개정판이다. 450쪽에 “탄핵소추 의결은 개별사유로 이루어지는 것이 국회의원들의 표결권을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서 바람직하다”고 적혀 있다. 탄핵소추 이유가 여러 가지일 때 하나라도 중대한 위법이라고 판단되면 탄핵당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만약 헌재가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한다”고 결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대통령들은 보좌진이나 장차관, 수많은 자문위원회를 놔두고 청와대 부엌에 ‘시녀들’을 초대해 유엔 연설문부터 무기 배치 같은 국가기밀까지 무엇이든 상의해도 거리낄 게 없다. 인사검증 절차도 필요 없다.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 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만이다.
이른바 키친 캐비닛도 애써 숨길 필요도 없다. 기자든 기업가든 아니 장관이라도 국무회의보다는 청와대 관저에서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귀를 쫑긋 세울 게 틀림없다. 청와대 대변인은 매일 아침 대통령이 보안손님들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브리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대기업 총수들은 괴로워질 게 틀림없다. 수시로 안가에 불려가 돈 좀 내놓으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하소연할 데가 없다. 대통령이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하는 일인데 전 재산인들 내놓지 않는다면 비애국자다. 지나친 강요라고 호소하는 건 무모하다. 혹시 뇌물로 줬다고 자백한다면 몰라도.
만약 철없는 기자가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다면, 대통령은 “참 나쁜 기자”라고 콕 찍어낼지도 모른다. 해당 언론사에 세무조사든 광고 기피든 뭐든 벌어지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획기적인 재택근무의 신기원이 열린다. 대형 재난으로 국민이 죽어가든 말든 대통령은 관저 식탁에서 홀로 아점을 먹거나 머리를 다듬고 있어도 된다. 전령이 긴급보고라며 전해주는 메모를 훑어보며 TV 리모컨으로 YTN을 켜 보면 국정의 최고 컨트롤타워로서 할 일을 다 했다 자부할 만하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 장관도 차관도 사무관이나 주사, 작은 관공서의 미관말직이라도 같은 이유로 파면당하지 않을 권리가 생긴다. 구청장이 노인정 타짜 할아버지와 독대해 “동네 문화융성을 위해 개평 좀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을 사진 찍어 구청신문에 자랑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애써 촛불을 들 필요도 없다. 나라가 잘되길 바라는 국민이라면 젓가락과 숟가락을 들고 청와대 부엌에 진입할 방법을 찾는 데 골몰하는 게 현명하다. 이미 대한민국은 5년마다 왕을 뽑는 투표군주제 국가가 되어 있을 터이니 말이다.
김지방 사회부 차장 fattykim@kmib.co.kr
[세상만사-김지방] 탄핵이 기각된다면
입력 2016-12-29 1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