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현직 일본 정상으로는 최초로 진주만 공습 추모관인 ‘애리조나기념관’을 찾아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그는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지만 예상대로 사죄나 반성은 하지 않았다.
AP통신과 CNN방송 등은 아베가 27일 오전(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마지막 정상회담을 가진 뒤 함께 애리조나기념관을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1950년대 일본 총리 세 명이 진주만을 찾았지만 애리조나기념관을 공식 방문한 것은 아베가 처음이다.
애리조나기념관은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침몰한 미 해군 애리조나함 위에 62년 세워진 추모시설이다. 공습으로 숨진 미국인 2403명 중 1000여명이 애리조나함과 함께 수장됐다.
양 정상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벽 앞에 헌화한 뒤 나란히 묵념했다. 이후 진주만 히캄 기지로 자리를 옮겨 성명을 낭독했다.
성명에 사죄나 반성의 말은 없었다. 대신 아베는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부전(不戰)의 맹세’와 함께 “전쟁으로 희생된 영혼들 앞에 변함없고 진심어린 애도를 바친다”고 밝혔다. 또 적에서 친구로 거듭난 양국 관계를 ‘희망의 동맹’으로 표현하며 “세계인이 진주만을 화해의 상징으로 기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베는 “미국의 리더십 덕에 일본이 평화와 번영을 즐길 수 있었다”는 감사도 표했다.
오바마는 “평화의 결실은 언제나 전리품보다 크다”며 “아베 총리의 역사적인 행보가 화해의 힘을 보여준다”고 화답했다. 이어 “미·일 관계는 세계 평화의 반석”이라고도 덧붙였다.
뉴욕타임스(NYT)는 아베의 진주만 메시지에 “오바마 대통령의 일본 히로시마 방문이 반영돼 있다”고 분석했다. 오바마는 지난 5월 미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를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그러나 그 역시 사과는 하지 않았다.
아베가 이번 방문으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성과를 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우선 외교적으로 정권 교체를 앞둔 미국과의 동맹을 굳건히 해 중국을 더욱 견제할 수 있게 됐다. 정치적으로는 사죄를 생략함으로써 자국 내 지지층인 우파 세력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으로 입은 피해가 미국보다 막대한 아시아 국가들은 사죄가 빠진 아베의 ‘외교 쇼맨십’을 비판했다. 특히 중국 환구시보는 “진심으로 역사적 범죄를 사과하고 화해하길 원한다면 아베 총리가 가야 할 곳은 하와이가 아닌 중국 난징이나 한국 서울”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아베의 진주만 추모 직후 이마무라 마사히로 부흥상이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이율배반적인 일본의 행태에 대한 비난은 거세지고 있다. 이곳에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다. 피해자에게 애도를 표하자마자 가해자들을 위령한 것이다. 교도통신조차 “이번 참배로 (과거사 반성에 대한) 의문이 커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사죄 건너뛰고… 아베, 오바마와 진주만 첫 공동추모
입력 2016-12-28 2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