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소박’과 ‘천박’… 트럼프 낳은 反지성주의 두 얼굴

입력 2016-12-29 17:23
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사건’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막말과 기행을 일삼던 트럼프는 지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트럼프 지지자들이 지난 17일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의 레드-피블레스 경기장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트럼프의 연설에 환호하고 있는 모습.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사실을 왜곡한 발언을 쏟아내는가 하면 ‘정치적 올바름’을 비웃으며 여성 이주민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을 일삼았다. 언론이나 지식인층은 트럼프의 무식과 천박함을 앞 다퉈 비판했지만,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트럼프의 당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 원인을 ‘반지성주의’에서 찾고 있다. 비단 트럼프만이 아니라 역대 미국 대선에서 똑똑한 엘리트가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앤드루 잭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등은 지적 능력이 두드러지는 상대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이 됐다. 사실 반지성주의라는 말도 1952년 아이젠하워와 아들라이 스티븐슨의 대선으로 생겨났다. 대중은 똑똑한 스티븐슨 대신 친밀한 이미지의 아이젠하워에 표를 던졌다.

목사이기도 한 모리모토 안리 일본 국제기독교대 교수가 쓴 ‘반지성주의-미국이 낳은 열병의 정체’는 미국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인 반지성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개신교의 역사, 특히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신앙부흥운동의 물결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18세기 최초의 신앙부흥운동은 초기 미국 개신교의 주류였던 청교도의 극단적인 지성주의에 반발해 일어났다. 프로테스탄트 개혁파인 청교도는 16∼17세기 영국에서 성공회보다 훨씬 엄격한 신앙운동을 주창했다가 박해를 받았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는 목사들에게 유난히 높은 수준의 성서 해석 및 해설 능력을 요구했다.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꼽히는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은 원래 청교도 목사 양성을 위해 설립됐을 정도다.

당연히 이들 청교도 목사가 집행하는 예배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적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 18세기 중반 이른바 ‘대각성(The Great Awakening)’으로 불리는 신앙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당시 신앙부흥운동을 이끈 목사들은 기존의 청교도 목사와 달리 쉬운 말로 교리를 설명했다. 감동받은 사람들은 환희와 참회로 흐느껴 울었다.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 상태였다.

이런 반지성주의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지성에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특권계층에 대한 반발을 내포한 반권위주의와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부흥운동은 18세기에 미국 독립혁명의 정신적 기반이 됐고, 19세기에는 노예폐지운동과 여권신장운동에, 20세기에는 민권운동과 소비자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신앙부흥운동에 내재한 평등이라는 이념 덕분이었다. 저자는 “신앙부흥으로 일단 확신이 생기면 지상의 어떤 권위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도전하기도 하고 반발하기도 하는 정신을 다지게 됐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신앙부흥운동을 이끄는 목사들이 주는 가르침은 너무나 단순했다. ‘믿으면 축복, 아니면 멸망’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였다. 이런 단선적인 도덕론은 성서 안에서도 예외적이지만 미국인의 정신을 지배하게 됐다는 점에서 사실상 현재의 미국을 만든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미국 정신이란 예나 지금이나 곧게 뻗은 선로 위를 힘차게 달리는 기관차 같은 정신이다. 이 나라 문화가 가지고 있는 솔직함 소박함 천박함은 모두 이런 이분법을 전제로 하고 있다”며 “20세기 미국의 산물인 개신교 내부의 근본주의, 종말론에서 말하는 의로운 전쟁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미국의 군사외교정책 모두 그 산물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지적한다.

물론 반지성주의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포퓰리즘에 휩쓸리기 쉬운 만큼 권력에 이용당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전반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매카시즘 광풍이 대표적이다. 또 20세기 TV전도사로 대표되는 3차 신앙부흥운동은 대기업과 결탁하며 변질됐다.

하지만 저자는 “권력과 지성의 타락을 막는 본래적인 의미의 반지성주의는 사회의 건전성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요소”라면서 “결국 반지성주의자가 꼭 갖추어야 할 요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성’이다. 지성이 있어야 지성과 유착한 권력에 대항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