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이 휴가를 다 쓰도록 장려하는 연차휴가사용촉진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오히려 휴가 사용을 막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의 한 홈쇼핑 업체에 근무하는 박모(33)씨는 연차휴가가 7일이나 남았지만 올해가 사흘밖에 남지 않은 28일에도 휴가를 쓸 엄두조차 낼 수 없다. 회식자리에서 연차 얘기를 슬쩍 꺼내 봤지만 상사에게 “네가 뭘 했는데 쉬느냐”는 면박만 당했다.
유통업체 입사 5년차 최모(28·여)씨 사정도 마찬가지다. 5일의 연차휴가를 못 썼지만 연말이 바쁜 업계 특성상 휴가계획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하루만 휴가를 쓰겠다고 했는데 상사는 “바쁜데 꼭 그래야 하느냐, 반차만 쓰라”고 말한다.
법으로 보장된 연차휴가지만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남은 연차를 포기해야 하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지난달 7일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남녀 직장인 115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46.3%가 ‘매년 연차휴가를 다 쓰지 못한다’고 답했다.
여행정보회사 익스피디아가 세계 28개국 직장인 9424명을 조사한 결과 한국의 연차휴가 보장 수준은 하위권이었다. 한국인의 연차휴가 일수는 평균 15일로 홍콩, 멕시코, 태국, 말레이시아와 함께 적은 수준이었고, 미사용 일수는 7일로 일본과 함께 최하위권이었다. 국회입법조사처의 2013년 조사에서 휴가를 못 쓰는 이유는 ‘일이 많아서’ ‘직장 분위기상 휴가를 쓰지 않아서’ 등이 가장 많았다.
2003년부터 시행된 연차휴가사용촉진제도도 별 효과가 없었다. 사용자가 근로기준법에 정한대로 연차휴가를 쓰도록 요구하면 남은 연차휴가는 금전적으로 보상할 의무가 없다는 내용이다. 강제성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지고 오히려 회사가 휴가를 지정해놓고도 출근시키는 악용사례도 적지 않다.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국민여가활성화법 개정안이 지난 1일 국회를 통과했다. 주요 골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의무적으로 직장인들의 휴가사용실태조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직장인들이 자유롭게 연차휴가를 쓸 수 있도록 실질적 권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민주노총 법률원 김세희 변호사는 “여가활동을 보장하자는 개정안의 큰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휴가 시기 결정권을 엄격하게 법에 명시하는 등 직장인들이 눈치 보지 않고 연차휴가를 쓸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도 “열악한 사업장의 저임금 노동자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공산이 크다”며 “연차휴가를 일정하게 소진토록 강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연차휴가를 사용하면 동료가 일을 떠맡는다는 죄책감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서 비롯한다”며 여유인력의 확보 등 근본적인 개선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
[기획] 상사 눈치보여… 연차 못쓰는 직장인
입력 2016-12-29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