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북 경주, 야성미 넘치는 일출과 닭의 설화

입력 2016-12-29 04:01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동해의 문무대왕릉에 사나운 사자의 기세처럼 야성미 넘치는 파도가 넘실대고 있다. 붉은 기운을 토해내는 해돋이를 배경으로 자유롭게 비상하는 갈매기들이 황홀한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계림을 찾은 관광객이 오랜 세월 풍상을 겪은 나무의 모습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고 있다. 이 숲은 신라시대부터 영험한 곳으로 알려져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덕분에 느티나무, 회화나무, 왕버들나무, 물푸레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바다 위 돌꽃’ 양남 주상절리
멀리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이견대(왼쪽), 삼국통일의 주역 '화랑' 김유신 장군 묘
‘다사다난’을 넘어 격동의 한 해였던 ‘원숭이의 해’가 사흘도 남지 않았다. 정유년(丁酉年) ‘닭의 해’가 눈앞에 다가왔다. 정유년의 정은 붉은 색을 뜻해 내년은 ‘붉은 닭’의 해다. 옛사람들은 닭을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심부름꾼으로, 또는 사악한 것을 쫓아내고 복을 불러오고 입신출세(立身出世)를 기원하며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겼다. 격랑의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해를 볼 수 있고, 닭과 관련된 설화를 들을 수 있는 화랑(花郞)의 도시 경북 경주로 떠나보자.

닭이 우는 소리가 있었다, 계림

계림(鷄林·사적 19호)은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탄생 설화와 관련 있는 곳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4대 탈해왕 9년(서기 65년) 3월 어느 날 밤, 왕이 금성(金城) 서쪽 울창한 숲 시림(계림)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은 뒤 호공(弧公)에게 살펴보도록 했다. 호공이 숲속에 가니 나뭇가지에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 하나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의 보고를 받은 왕이 숲으로 행차해 금궤 뚜껑을 열어보니 총명하게 생긴 어린 남자아기가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기를 길렀다. 왕은 금궤(金函) 속에서 나왔다 해 성을 김(金)씨로, 이름을 ‘알지’라 했다.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로 여겨 태자로 삼았으나, 나중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왕위에 오른 것은 김알지의 7대 후손 미추왕이다. 이후 17대 내물왕(재위 356∼402년)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경주 김씨가 신라를 다스렸다.

약 7300㎡의 작은 숲 계림에 들어서면 계림비각이 눈에 띈다. 기와를 얹은 낡은 돌담 안에는 계림의 내력과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새긴 ‘경주김씨알지탄생기록비’가 있다.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세운 것이다.

숲은 신라시대부터 영험한 곳으로 알려져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덕분에 느티나무, 회화나무, 왕버들나무, 물푸레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부러지거나 휘어진 모습에서 오랜 세월 겪은 풍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명을 다하고 고사한 흔적도 역력하다.

숲 한가운데에는 내물왕릉(사적 제188호)으로 추정되는 능이 있다. 흙으로 쌓은 높이 5.3m, 지름 2.2m 규모의 원형 봉토무덤이다. 아래는 자연석으로 둘레 석이 돌려졌고, 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숲 곳곳에 설치된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사색을 할 수 있다. 인근 인왕동 고분군은 물론 길 건너 첨성대까지 한눈에 바라보인다. 계림 옆 교촌한옥마을에 경주 최씨 고택, 경주향교 등도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야성미 넘치는 바다에 깃든 호국정신, 문무대왕릉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바다에는 신라 30대 문무왕의 수중릉(사적 158호)이 있다. 태종무열왕의 장자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며 화장해서 동해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화장해서 지금의 수중릉에 뿌렸다. 봉길리 해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는 길이 20m 바위섬이 수중릉이다. 바위섬 가운데 조그만 수중 못이 있고, 그곳에 길이 3.7m, 너비 2.06m, 두께 0.9m의 화강암이 놓여 있다. 신문왕이 682년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감은사를 짓고, 감은사 금당(金堂) 밑에 특이한 공간을 만들었다. 마룻바닥 밑을 땅보다 높여 돌다리 놓듯이 만든 흔적이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된 아버지가 감은사 금당까지 드나들게 하려고 만든 공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절은 사라지고 그 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다. 높이 13m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크다. 문무대왕릉(대왕암)과 봉길리 해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이견대다.

봉길 해변에 있는 대왕암의 일출은 일품이다. 옛 신라의 화랑들은 감포 앞바다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마음을 다지고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해가 떠오를 무렵 이곳 바다는 용광로처럼 들끓는다. 거센 바람을 타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집채만 한 파도 저 너머로 푸른 용이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다. 으르렁거리는 사나운 사자처럼 야성미 넘치는 바다 위로 갈매기들은 무념무상의 자유를 과시한다. 그 너머로 붉은 빛을 토하며 떠오르는 태양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바다 위에 한 송이 돌꽃이 피어 있다. 양남 주상절리다. 주상절리는 화산이 폭발하며 용암이 흐르다 차가운 바닷물을 만나 바위가 된 것이다. 고대 신전 기둥처럼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나 주름치마처럼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더러는 자른 원목을 포개 놓은 것 같다. 다양한 모습으로 해안선을 따라 흩뿌려져 있다.

삼국통일의 초석이 되다, 화랑

신라 29대 태종무열왕과 30대 문무왕, 태대각간 김유신 장군이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손꼽힌다. 김유신 장군은 609년 15세에 화랑이 돼 낭도를 이끌고 수련했다. 629년 나제동맹이 깨어지고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해 신라를 침공하자 고려군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644년 소판이 되고 상장군에 올라 백제국의 가혜성 등 7성을 점령하고 매리포성을 방어하는 등 수차례 싸움에서 승리했다. 최근 드라마 ‘화랑’이 방영되면서 신라 화랑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1.4㎞ 거리에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 장군의 묘(사적 21호)가 있다. 그곳에서 약 3㎞ 거리에 김유신 장군과 처남 매부 사이였던 신라 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의 능(사적 20호)이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능 가운데 주인이 정확하게 알려진 몇 안 되는 능이다. 능 앞에 태종무열왕릉비(국보 25호)가 있는데, 비석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았다. 머릿돌 중앙에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있다.

태종무열왕릉 위에 자리한 고분은 경주 서악동 고분군(사적 142호)이다. 장중한 위용을 갖춘 이 고분들은 보는 위치에 따라 겹쳐지는 능선이 색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경주에 있는 대부분 고분처럼 주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왕릉이 큰 편에 속하고, 무열왕릉 바로 뒤에 있어 왕이나 왕족의 분묘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여행메모
경주 동해의 별미 '양남 주상절리빵', 게스트하우스… 실속 '혼행족'에 인기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경주 시내로 가려면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게 좋다. 김천에서 다시 경부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경주나들목에서 빠지면 인근에 무열왕릉과 김유신장군묘가 있다. 계림은 시내 중심부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있다.

시내에서 문무대왕릉에 가려면 7번 국도를 타고 울산 방면으로 가다가 남경주나들목에서 지난 6월 개통된 울산포항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빠르다. 동경주나들목에서 나와 14번 국도를 타고 가면 감은사지를 지나 우회전하면 금세 닿는다. 이견대는 문무대왕릉 인근에 있다. 양남 주상절리는 문무대왕릉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울산방면으로 가다 보면 읍천항 인근에 있다. 현재 전망대 공사 중이어서 접근이 쉽지 않다.

이 일대에서는 '양남 주상절리빵'이 인기다. 주상절리 모양을 한 찰보리빵으로 앙금에 호두를 넣었고, 오징어먹물을 천연색소로 사용한다. 양남빵집과 주상절리 근처 휴게소에서 판매한다.

경주 시내와 보문관광단지에 호텔과 콘도 등 숙박시설이 여럿 있다. 하지만 실속있게 혼자 여행을 즐기는 '혼행족'이라면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보자. 다른 여행객과 침실·화장실 등을 함께 이용해야 한다는 불편함은 있지만 평균 숙박비가 2만∼5만원 수준으로 저렴하다. 특히 여행에 공감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경주 봉황대 앞에 자리 잡은 게스트하우스 '여행길'(054-745-0114)은 조용하고 아늑하다. 대릉원·천마총 등과도 가까워 주변을 여행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경주=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