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기호] 클래스는 영원하다

입력 2016-12-27 18:10

한 십 년쯤 광주에서 살다보니, ‘광주 클래스’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때가 종종 있다. 얼마 전엔 차를 몰고 광주에 하나뿐인 순환도로를 달리다가 좌측 야산 중턱에 내걸려 있는 대형 플래카드를 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박근혜 하야’라는 글자가 큼지막한 고딕체로 적혀 있었는데, 다름 아닌 그 야산에 위치한 한 사찰이 내건 플래카드였다. 플래카드는 사찰의 대웅전을 다 가리고도 남을 만큼 그 크기가 거대했다(대충 광화문 교보문고에 내걸린 글자판 크기와 엇비슷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 야산 전체가, 소나무들과 전나무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박근혜 하야’를 간절히 외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마치 나무들이 각자의 가지들을 흔들면서 ‘박근혜 하야, 박근혜 하야’ 하고 웅얼거리는 듯했다. 나무들도 이 겨울에 고생이 참 많다, 잠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파트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국민의 명령이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라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는 베란다가 많았는데, 이게 무슨 단체로 이불 빨래를 내건 것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장관을 연출했다. 장관을 연출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바람이 불면 그 소리가 조금 으스스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치 아파트 전체가 귀곡 산장 음향효과를 내는 것만 같았다. 밤늦게 가만히 그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아, 무서워 죽겠으니까 국민의 명령 좀 들어주라,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만다(누군가는 아파트 브랜드 간판 바로 옆에 ‘박근혜 퇴진’이라고 적힌 빨간색 스티커를 살포시 붙여 놓았는데, 그래서 아파트 이름이 ‘박근혜 퇴진 e편한세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박근혜는 위험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놓고 현수막을 내건 입시학원이 있지 않나(아니, 그래도 학원에선 수학이나 영어를 잘 가르친다고 홍보해야죠. 그게 맞지 않나요, 원장님), 촛불을 들라고 했더니 횃불을 들지 않나, 딱 봐도 초보운전인 티 팍팍 나는데, 뒤 유리창에 ‘우리는 물러나지 않는다’ 스티커를 붙여놓지 않나(알겠으니까, 제발 차선에선 물러나줘요. 클랙슨을 울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이건 마치 도시 전체가 광화문 광장으로 변한 듯,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풍경과 사람을 자주 만났다.

그래 이 ‘클래스’가 과연 어디에서부터 왔나 궁금해서 광주 토박이가 쓴 책을 찾아 읽어보았더니(‘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라는 책이었다), ‘획득형질’이라는 낯선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80년 5월 금남로에서 함께 구호를 외치고, 노래 부르고, 박수 치고, 울고 웃으면서 얻은 ‘획득형질’이 지금까지 유전되고 전염되어 왔다는 생각. 날카로운 한 번의 기억은, 광장의 목소리는, 수십 년이 지나도 쉬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전언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광화문과 전국의 수많은 광장들에서는 주말마다 또 다른 ‘형질’들이 연이어 생성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 ‘형질’은 유머러스한 데가 없지 않고 지속적이고 끈질기다는 점에서, 우리가 경험한 그 어떤 ‘형질’보다도 힘이 세 보인다. 그만큼 사람들의 ‘클래스’가 올라간 것이다.

죽 쒀서 개 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조용히 ‘주식 갤러리’ 사이트에 들어가 본다. 주식 빼곤 다 잘한다는 이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훌륭하다,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어쨌든 ‘클래스’는 영원한 법이니까. 웃으면서 오래오래, 생활 속에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2016년 세밑이다.

이기호 광주대 교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