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이념논란에 정부 지원금 끊긴 통영음악제

입력 2016-12-25 19:11
작곡가 윤이상(사진)은 남북한 분단과 냉전 속에서 ‘정치적 망명 작곡가’가 됐다. 그는 고향인 통영을 늘 그리워했지만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베를린에서 타계했다. 사후에도 그를 둘러싼 이념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윤이상(1917∼1995)은 한국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세계 클래식계의 중심에 섰다. 그의 음악은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내년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도 그는 여전히 이념 논쟁의 한가운데 있다. 그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는 국비와 도비 지원이 중단되면서 시비 10억원으로만 치르게 됐다.

통영 출신인 그는 프랑스 유학 시절이던 1959년 독일 다름슈타트음악제에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로 건너간 뒤 1966년에 독일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에서 대편성 관현악곡 ‘예악’으로 국제적인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1967년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서울로 강제소환,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평소 박정희 독재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가 1963년 사신도를 보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것을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맨 것이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세계 예술가들의 구명운동과 독일 정부의 한국 정부 압박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동백림 사건은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 의해 정부가 무리하게 간첩죄를 적용했으며 조사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음이 공식 밝혀졌다.

독일로 귀화한 그는 스스로 택했던,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던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남측에서 그의 방문조차 금지하는 동안 북한은 그의 이름을 딴 윤이상음악연구소와 윤이상음악관현악단을 세우는 등 그를 우대했다. 북한으로선 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4년 그의 음악이 해금되고 ‘윤이상음악제’가 열리는 것을 계기로 그는 귀국을 추진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공식사과와 각서를 요구하면서 귀국이 무산됐고, 그는 이듬해 세상을 떴다. 이어 김대중 정부에서 그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급물살을 탔다. 2000년 통영문화재단과 국제윤이상협회가 그를 기리는 통영현대음악제를 시작했으며, 2002년부터 통영국제음악재단이 운영하는 통영국제음악제로 재정비돼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남북한 화해 무드였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엔 국가와 경남도의 지원이 적지 않았지만 보수적인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서 그의 이념 논란이 다시 일더니 예산도 점점 축소된 끝에 아예 중단됐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역시 올해 국비에 이어 내년 도비 지원이 중단되면서 개최에 차질이 생긴 상태다.

한편 통영국제음악재단은 윤이상 탄생 100주년에 맞춰 내년 1년간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윤이상의 다양한 음악들을 조명할 예정이다. 3월 31일부터 4월 9일까지 열리는 2017 통영국제음악제는 그 하이라이트다. ‘아시아에서 세계로’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축제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개막공연을 시작으로 국내외 저명 연주자(팀)의 공연이 줄을 잇는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