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할머니와 단둘이 가난하게 자란 탓에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들었다. 농구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가난이 싫어서 독한 마음을 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할머니께 효도하고픈 마음으로 농구공을 만졌다. 학창시절 몸에 베인 ‘악바리 근성’은 20년째 이어졌고, 한국프로농구(KBL) 사상 최초 1000경기 출전이라는 위업에 다가섰다. ‘살아있는 레전드’ 주희정(39·서울 삼성)의 얘기다.
지난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생명 휴먼센터에서 만난 주희정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1000경기를 눈앞에 뒀지만 그는 무덤덤했다. KBL 원년인 1997년 원주 나래(동부의 전신) 연습생으로 데뷔해 한해도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코트를 누볐다. KBL 한 시즌이 54경기인데 20년간 단 12경기만 결장했다.
그는 23일 안양 KGC전에서 개인통산 1000번째 경기에 나선다. 역대 2위 기록은 전주 KCC 추승균 감독의 738경기다. 현역선수 2위는 원주 동부 김주성으로 22일 현재 656경기에 나섰다. 올해 37세인 김주성이 6년여간 꼬박꼬박 출전해야 1000경기를 달성한다. 주희정의 기록은 당분간 불멸의 영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주희정은 “900경기 때도 1000경기까지 갈 것으로 전혀 예상치 못했다”며 “경기수를 무의미하게 채우지 않으려 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1000경기뿐 아니라 각종 대기록도 쓰고 있다. 통산 최다 어시스트(5342개)·스틸(1495개)·국내선수 최다 트리플 더블(8개)이 그의 몫이다. 통산 득점(8529점·5위)과 리바운드(3408개·4위), 3점슛(1143개·2위) 부문에서도 상위권이다. 그는 “대기록이 나올 때면 유독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1000경기는 할머니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주희정의 할머니는 생전 손자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홀로 구멍가게를 운영했고, 아파트 환경미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운동선수는 체력이 우선’이라며 각종 보양식을 직접 만들어 먹였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삼시세끼 ‘쌀밥’만큼은 꼭 챙겼다. 주희정은 “할머니 영향 탓인지 지금도 쌀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며 자신만의 체력 관리비법을 공개했다.
주희정은 1997-1998시즌 KBL 최초의 신인왕에 올랐다. 하지만 한 시즌 만에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체력과 스피드는 최고였지만 슛이 약해 ‘반쪽선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그는 이를 더 악물고 체육관에 살다시피 했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밤늦게까지 홀로 체육관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고민하고 땀을 흘리며 하나씩 해법을 찾았다. 주희정은 “슬럼프가 올수록 더 운동에만 매진했다. 그래야 마음이 풀렸다”고 회고했다.
매일 저녁 약점을 보완하고자 3점슛을 500개씩 던졌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프로 데뷔 4년차인 2000-2001시즌 삼성의 통합 우승을 이끌고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그러나 우승의 기쁨도 잠시였다. 그의 할머니는 2002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멘토이자 정신적 지주인 할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슬픔의 나날을 보내던 주희정은 그해 7월 아내 박서인 씨와 결혼했다. 아내에게서 할머니의 따스함을 느꼈다. 힘들 때마다 하늘에 계신 할머니,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을 떠올리며 ‘가장’의 마음으로 코트에 섰다. 주희정은 “경기가 안풀리면 집에선 아내와 대화하며 해법을 찾는다. 항상 곁을 지켜준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고 했다.
주희정은 후배를 향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선수는 좋은 인성이 철칙이다. 항상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운동하고, 힘들 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라.” 그는 “은퇴 전 우승반지를 하나 더 끼고 싶다”며 “마지막까지 노력하는 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상민 감독 "동료들이 말릴 정도 연습벌레"
농구인들은 한국프로농구(KBL) 최초 1000경기 출전을 앞둔 주희정을 어떤 선수로 보고 있을까. 주희정의 선후배 동료들은 그를 소문난 '연습벌레'라고 입을 모은다. 주희정이 직접 운동하는 모습을 본 뒤 '운동 중독자' 수준이라며 혀를 내두른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다.
삼성 이상민 감독은 현역시절 주희정과 특별한 교류가 없었다. 상대 선수로 만난 게 전부였다. 지난 시즌 주희정이 서울 SK에서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감독과 선수로 인연을 맺었다.
이 감독은 "이전까지는 소문만 들어서 잘 몰랐다. 같은 팀에서 보니 운동을 말릴 정도로 열심히 하는 선수"라며 주희정을 추켜세웠다. 또 "고참 선수가 솔선수범하니 감독 입장에서 고마울 따름"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주희정의 1000경기 출장에 대해선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내가 주희정처럼 운동했으면 5년은 더 뛰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주 동부 김주성은 주희정의 부산 동아고 2년 후배다. 김주성은 "1000경기 출장은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본받아야할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고교시절 희정이 형은 취침시간이 됐는데도 체육관에서 운동하느라 숙소로 오지 않았다"며 "선배가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도 안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농구선수로서 그런 성실한 모습이 내게도 많은 자극을 줬다"고 했다.
SK 문경은 감독은 2001년 현역 시절 삼성에서 주희정과 동료로 한솥밥을 먹었다. 그 해 문 감독은 주희정과 슈터와 포인트가드로 호흡을 맞췄고, 챔피언결정전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문 감독은 "주희정은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 선수다. 1000경기 출전은 젊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또 "데뷔 초부터 리딩 능력과 스피드가 좋았던 선수"라며 "보이는 곳에 패스를 잘 찔러줬고, 덕분에 나도 편하게 3점슛을 쐈다"고 회고했다.
용인=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프로농구] KBL 최초… 23일 대기록 세우는 ‘살아있는 레전드’ 주희정
입력 2016-12-23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