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윤탁 칼럼] 성탄과 새해, 우리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입력 2016-12-23 20:47
대림절 초.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것도 매 안식일마다(행 13:27) 기다리던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태어난 그 날 밤에는 방 한 칸도 마련하지 못했다.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요셉이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렸지만, 하나같은 대답은 ‘빈 방 없음’이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도 아기 예수 탄생 예언이 이루어진 곳은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이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교회마다 촛불을 켜고 대림절을 지킨다. 보랏빛 양초에 소망과 평화, 사랑과 기쁨의 불을 붙일 때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성도들의 마음을 싣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거리마다 울리던 성탄절 캐럴이 사라져가고,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폄훼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전통의 불빛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우리는 엄청난 촛불 행렬과 함께 성탄절을 맞는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주님을 환영하며 호산나를 찬양하던 무리를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항의했을 때 주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눅 19:40)

광화문광장을 비롯해 전국의 큰 도시에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촛불들이 등장했다. 한국정치의 어두움을 밝혀야 한다는 소망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촛불행렬이 대림절 주간 토요일마다 길거리에 이어졌다. 외치는 구호는 달랐지만 낮시간에 같은 도로를 가득 메운 태극기의 물결도 있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촛불을 밝히며 기도하는 내용과 군중들이 바라는 소원은 구별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일을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은 같은 게 아닐까. 뭔가를 기대하는 소망이 그렇고, 평화로운 시위를 통해 평안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뜻이 그렇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 기쁨의 그 날을 기다리는 열정이 서로 닮았다. 그러나 이런 열정도 잘못된 욕심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순수치 못한 목적을 가진 외침이라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큰 울림이 퍼진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여당이나 야당, 정치 지도자나 시민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지금이 바로 새로운 역사를 이뤄가는 특별한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마음을 비워야 한다.

바로의 왕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혈기마저 꺾여버린 80세의 모세가 이스라엘 지도자가 된 것도, 부정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뒤 내침을 당한 요셉이 끝내 애굽의 총리가 됐던 것도, 오로지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는 골리앗에 대한 분노로 전쟁터에 나갔던 다윗이 통일된 이스라엘의 선군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사심을 버릴 수 있는 빈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처럼 변화와 혁신을 위해 주어진 기회가 사유화되지 않도록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야가 그들 앞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집에 사로잡히고 고집을 버리지 못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2000년 동안이나 나라까지 잃어버리는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개인적인 일도 마찬가지다. 주님을 만나는 성탄절이 되고,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리스도인은 더욱 사심을 버려야 한다. 물질이든 시간이든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버려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주님 앞에 빈 방을 내어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채워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3일 동안 만드신 공간에 해와 달과 별들, 각종 나는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 땅에 기는 온갖 짐승으로 채우시고 모든 것을 사람에게 맡기신 하나님이시다. 가나의 혼인잔치 집 빈 항아리에 포도주를 가득 채우시고, 우물가의 여인의 허전한 가슴을 복음으로 채워주신 주님이시며, 죄로 인해 부도난 우리의 인생을 위하여 그의 피로 채우신 예수님은 궁극적인 영혼구원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환난과 고통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다.

손윤탁 <남대문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