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철학자 파커 팔머가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을 이야기할 때 그 핵심은 ‘무엇을 배우느냐보다 누구에게 배우느냐’가 더 중요하고, ‘누구에게 배우느냐보다 어떤 상황에서 배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영성은 개별적이면서도 구조적이고, 내면적이면서도 외향적이며,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교수가 권위주의적인 사람일 때, 학생들은 그 교수에게서 민주주의를 배울까, 권위주의를 배울까? 당연히 그 교수의 학생들은 권위주의를 더 잘 배워서 권위적인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교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육의 현장이다. 그 학교가 열린 소통의 공간을 만들고 참여와 협력의 일치를 이루어내서 학생 중심, 사람 중심의 행정과 운영체계가 정착된 민주적인 학교라면 비록 그 교수가 권위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더 잘 체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수가 좋은 교안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수 자신이 아름답고 진실한 사람으로 성숙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교육의 현장인 학교가 따뜻하고 상호 배려하며 인격적인 진리가 경험되는 공간이 되도록 만들어가는 것은 더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좋은 학교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은 법인을 운영하는 이사회뿐 아니라 교수와 학생, 졸업생, 그리고 학부모까지도 함께 참여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강력한 교육의 현장은 사회일반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이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영향받고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가치관과 도덕의식, 그리고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그들에게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사회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너무나 비교육적이다. 권위적이고, 일방적이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독점적일 뿐만 아니라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조선시대의 신분적 차별주의와 일제 강점기 폭력적 식민주의, 개발독재시대의 비인권적 권위주의가 함께 버무려져서 마치 구제불능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편 다행스럽게도 탄핵정국에서 나타나는 일반 서민들의 모습은 매우 교육적이었다. 엄청난 분노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방법을 추구했고 자발적이었으며 자유로웠지만 질서가 있었다. 더 나아가서 마치 문화적인 축제처럼 즐거운 모습으로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전 세계 선진국과 후진국들에 놀라움을 갖게 하였다. 테러와 전쟁이 휩쓸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 아주 커다란 교훈을 보여주었다. 위정자들이 망신시킨 나라의 체면을 시민들이 회복시켜 준 것이다.
팔머가 제안한 영성적 교육의 원리는 신앙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메시지보다 메신저, 메신저보다는 속한 신앙공동체가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전도하고 설교하는 내용보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신앙에서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는 전도자가 아무리 열심히 전하고 유창하게 설명한다 해도 스스로 믿지 않거나 소유하지 못했다면 전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나아가 차갑고 무관심하며 다투고 갈라지는 교회라면 전도자의 신앙이 고상하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전도의 결과는 역시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따라서 전도하려 하기 전에 먼저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 한 사람의 신앙에만 관심을 갖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바른 교회가 되도록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애석하게도 가장 중요한 두 기관, 교회와 학교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부장적이며 비민주적인 낡은 형태로 남아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성경은 말한다.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 다니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고.
유장춘 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교수
[바이블시론-유장춘]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입력 2016-12-22 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