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에세이] 물렁물렁한 크리스마스

입력 2016-12-23 20:48

캐럴은 사람의 마음을 물렁물렁하게 한다. 성탄절의 기쁨과 더불어 벌써 한 해가 다 가고 있다는, 시간과 인생에 대한 정념이 밀가루반죽처럼 형태 없이 한데 섞이기 때문이다.

캐럴은 따뜻한 물과 경쾌한 발걸음, 그리고 회한에 잠긴 노인의 미소같이 서로 이질적인 정감을 뒤섞어 놓는다. 그래서 캐럴이 흐르는 거리에선 직선으로 날아가는 시간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 안으로 휘어 들어온다. 익숙한 길에서 문득 캐럴과 마주칠 때 거울속의 낯선 나를 보는 것처럼 미묘한 감정에 빠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직선적인 시간과 정형화된 삶이 강요되는 현대의 일상에 지치고 피곤할 때면 물렁거리는 시간이 그리워진다. 내 어린 시절 시골교회의 크리스마스는 이 물렁거리는 시간의 질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허공을 가득 매달고 내리는 눈송이들과 그 눈송이 하나하나에 귀를 달아주던 캐럴송은 미묘한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그 미묘한 세계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성(性)과 성(姓)이 다르고 나이와 성격이 다른 친구들이 함께 모여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며 캐럴을 합창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야릇한 감정을 느꼈던 교회 누나를 향한 마음을 성탄 트리의 금방울 뒤에 살짝 숨겨놓기도 했다. 우리는 깔깔거리거나 호호거리거나 흥얼거리며 한 그릇의 비빔밥이 되었다. 비빔밥은 각자의 개성을 숨기면서도 자기 고유의 맛을 잃지 않는, 말랑말랑한 시간에 대한 은유다.

크리스마스가 있는 교회, 아니 교회가 있는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시험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걱정, 외모로 인한 스트레스 같은 것을 지울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일등과 꼴찌가 자기 형태와 개성을 버리고 크리스마스 속으로 들어왔다. 해마다 반복적으로 부르던 캐럴이 식상하거나 진부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물렁거리는 시간의 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벌써 구레나룻이 거뭇한 형들과 만만하게 자란 누나들 사이에서 나와 우리는 아무런 도덕적 경계심 없이 밤새 웃음꽃을 피웠다. 이불 속에 발을 묻고 꼼지락거리는 수많은 발가락들에게서 나는 같은 종족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근친성을 느꼈다.

그것은 믿음, 사랑, 은혜 등과 같은 종교적 언어로 길들여지기 전의 원시적 구원의 감정이었다. 그대가 있음으로 나는 안정과 평안을 누리고 그대와 함께함으로 나는 그대의 친구가 되고 있다는 감정 말이다. 강도 만난 사람의 친구가 됐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나는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또 누군가는 나의 위로와 안식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감정은 먼 훗날 예수님을 관념이 아닌, 사실과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게 했다. 크리스마스의 그 말랑말랑한 무정형의 시간 속에서 나는 형태 없는 구원의 질감을 느끼며 성숙해져 갔다. 그래서 나는 성탄절에 교회학교 아이들을 그냥 놀린다. 아이들을 무정형의 시간 속에 던져놓으면 아이들은 제 스스로 자기 형태를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촌놈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이 카오스의 밤을 아이들은 평생 기억하며 자기 삶의 형태를 창조할 것이다. 우리 교회는 오늘 성탄절 행사를 하지 않는다. 그냥 논다. 아이들과 키득거리면서….

<김선주 충북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