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손주들 사진 보는 게 나의 가장 즐거운 시간이란다. 요새 너희 일에 지장을 줄까봐 내 건강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4남매를 키운 A씨(92·여)는 1992년 장남 B씨(62)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B씨가 유학 생활 끝에 미국 명문 의대 조교수가 된 시점이었다. 장남이 자랑스러웠던 A씨는 자신의 서울 용산구 298.9㎡(90평) 땅과 3층 건물을 B씨 가족에게 물려준다는 증서를 써 줬다. 다만 자신이 숨진 후에 증여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두 사람은 ‘건물 임대 수익의 4분의 3은 A씨가, 4분의 1은 B씨가 가진다’는 계약서도 체결했다.
모자(母子) 갈등은 A씨가 2004년 알츠하이머(치매) 진단을 받으며 불거졌다. B씨 가족은 보호센터에서 생활하는 노모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섭섭함이 커진 A씨는 2009년 3월 ‘내 땅을 5등분해 4남매와 내 산소를 돌보는 사람에게 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썼다. 앞서 B씨에게 땅을 물려주겠다는 증서를 뒤집었다. 장남 B씨는 모친을 상대로 “20년 전 증서를 쓴 대로 땅을 달라”며 2012년 11월 소송을 냈다.
1심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증여증서대로 B씨에게 땅 소유권을 넘겨야 한다”며 B씨 손을 들어줬다.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 민사32부(부장판사 박형남)는 “망은(忘恩) 행위로 인한 소유권 이전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B씨 패소로 판결했다고 21일 밝혔다. 재판부는 “B씨는 미국에서 상당한 지위를 얻었고, 보수로 월 2만5000달러(약 2980만원)를 받는 등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에 비해 A씨를 부양하거나 그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A씨는 장남 B씨에 대한 기대와 긍지가 대단했다”며 “자신의 완곡한 부탁에도 B씨 가족이 실질적 도움을 주지 않자 섭섭함 등으로 땅 증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배은망덕’ 의사 아들에… 판사도 기가막혀
입력 2016-12-22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