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수많은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오늘 학교에 간다고 나간 아이들에게는 아무 일이 없을지, 다음주에 있을 건강검진은 괜찮을지, 이런 개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촛불과 탄핵으로 이어진 대한민국의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이르기까지, 예상치 못한 요소들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이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은 분명 불안함이었습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하나님 없이 혼자 힘으로 사는 삶’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 있던 이 불안함은 세대가 지나며 더 증폭돼 가인은 성을 쌓기에 이릅니다(창 4:17).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높고 튼튼한 성을 쌓습니다. 조금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혼자라는 외로움이 가인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문을 열자니 두렵고, 닫자니 외롭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이 느끼는 가장 고통스러운 두 감정, 두려움과 외로움은 현대사회의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적 고통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의 말이 간에 이상이 있어 질환 수치가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10년 안에 내 간의 기능은 완전히 정지한답니다. 미국인 의사라서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10년 뒤에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뒤척이다 할 수 없이 깨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깊은 ‘씨름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란 ‘내 운명은 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실 때, 세상의학이 무엇이라 하던지, 결국 내 운명은 그분에 의해 결정됩니다. 시편 4편의 배경은 다윗이 고난 가운데 있었을 때였습니다.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숨어 다닐 때이거나, 아니면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 다닐 때였습니다. 다윗이 도망 다녔던 이스라엘의 광야는 그리 넓은 곳이 아닙니다. 이 손바닥만한 광야에서 왕의 군대를 피해 도망 다닌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분명 다윗은 불안함으로 인해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놀랍게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손바닥만한 광야에서 왕의 군대에게 쫓기던 사람의 고백입니다.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한다니! 이 평안이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내 운명을 쥐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에서 왔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아셔야 합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는 두려움과 외로움의 저주 속에 살아야 하니까요. 얼마 전 건강검진을 했습니다. 나이가 들다보니 혈압도 좀 문제가 있고, 여기저기 자잘한 문제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간수치만은 정상이랍니다. 10년이 아니라 20년이 지났는데 말입니다. 나는 오늘도 평안히 눕고 잠자리에 듭니다. 수많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불안 속에서도 말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성준 목사 (수원하나교회)
약력=△서울대·대학원, 미국 UC버클리대학원 박사(수학), 침례신학대 목회신학대학원 △‘데스티니’ 저자 △컴미션 국제이사
[오늘의 설교]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입력 2016-12-21 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