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위작논란 끝… 檢 “천경자 ‘미인도’는 진품” 결론
입력 2016-12-19 18:38 수정 2016-12-19 21:37
지난 25년간 ‘위작 스캔들’을 겪어온 고 천경자(1924∼2015) 화백의 ‘미인도’에 대해 검찰이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넘어갔던 작품이 계엄사령부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입고됐다는 게 5개월간의 수사 결과다. 검찰은 미인도 소장 이력 추적과 과학 감정, 안목 감정 등을 병행해 이런 판단에 도달했다. 이는 프랑스 감정단의 “진품일 가능성은 0.00002%”라는 감정보고서 의견을 뒤집은 것이다. 유족 측은 즉각 반발했다.
김재규씨 집 거실에 걸렸던 미인도
검찰은 미인도가 1980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들어가기까지의 이동 경로 분석에 집중했다. 그 결과 천 화백이 77년 중정 대구분실장 오모씨에게 그림 2점을 건넨 사실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76년 대구에서 열린 국전(國展)에서 화랑운영자 소개로 안면을 텄다고 한다. 오씨의 부인은 그중 미인도를 숙명여대 동기인 김재규씨의 부인에게 선물했다. 김씨의 서울 성북구 자택 응접실에 미인도가 걸려 있는 것을 본 목격자들도 나왔다. 검찰은 김씨 부인을 상대로 “대학 친구에게 받았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미인도는 79년 박정희 시해사건인 ‘10·26사태’ 이후 계엄사령부 기부재산처리위원회에 헌납된다. 이후 영등포의 대한통운 물류창고에 보관됐다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당시 국가 감정 과정에서 지금의 미인도란 이름이 붙었다. 검찰 관계자는 “김씨 부인, 80년도 감정위원 등 100여명을 조사했다”고 말했다.
위작자도 “내가 흉내 못낼 작품”
위작 논란은 90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인도를 공개 전시하면서 시작됐다. 천 화백은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있겠느냐”며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했다. 99년에 권춘식(69)씨가 “미인도를 내가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되기도 했다.
검찰은 대검 과학수사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을 통해 X선·자외선·투과광사진 분석, 3D 촬영, 디지털 영상 분석 등을 진행했다. 미인도와 천 화백이 그린 다른 진품 13점, 권씨의 모작 1점 등을 비교했다. 9명의 감정위원에게 안목 감정도 맡겼다.
검찰은 미인도가 ‘백반·아교·후분 성분으로 바탕칠→두꺼운 덧칠→석채 사용’ 등 천 화백 특유의 제작방식대로 그려진 점을 확인했다고 한다. 육안으로는 관찰되지 않는 압인선(날카로운 필기구 등으로 사물의 외곽선을 그린 자국)이 미인도와 비교 진품의 꽃잎, 나비 등 섬세한 표현이 필요한 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미인도의 그림 밑층에 숨겨진 다른 밑그림의 존재도 발견됐다. 검찰은 “천 화백의 특징적 채색기법은 수정과 덧칠을 반복해 작품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이라며 “권씨의 모작에는 다른 형태의 밑그림이 없다”고 설명했다.
미인도의 앞머리나 눈썹, 콧날, 목과 쇄골 부위 선 등에서는 세밀한 스케치도 찾아냈다. 천 화백의 ‘차녀 스케치’(76년)와 미인도(77년), ‘장미와 여인’(81년) 사이에는 연속되는 유사성이 있다고 한다.
검찰은 위작자를 자처한 권씨를 4차례 조사했다. 권씨가 1, 2차 조사에서 진술한 제작 방식은 실제 미인도 분석 결과와 일치하지 않았다. 3, 4차 때 진품을 내보이자 권씨는 “내가 그린 게 아니다. 진품을 넘어 명품에 가까운 수작이다” “위작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검찰은 전했다.
또 다른 논란의 시작
검찰의 결론은 유족 측 의뢰로 미인도를 감정한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감정단의 의견과 완전히 배치된다. 검찰은 “위조 여부 판단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뤼미에르팀의 감정 보고서에는 심층적인 단층분석법이 제시되지 않았고, 이들이 사용한 계산식을 천 화백의 다른 작품에 적용한 결과 진품일 확률이 4%대에 불과했던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에 따라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부장검사 배용원)는 천 화백 유족 측이 사자명예훼손 등 혐의로 고소한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5명을 무혐의 처분했다.
유족 측 법률대리인단은 “못 믿겠다”고 반발했다. 대리인단은 “검찰이 세계 최고의 과학감정기관의 결과를 무시한 채 미인도를 진품으로 둔갑시키는 해괴한 해프닝을 저질렀다”며 “안목 감정에 참여한 위원 9명의 명단을 공개하라”고 주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해 “미인도를 진품으로 믿고 있었던 만큼 (검찰 발표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며 기뻐할 것도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위작 논란을 털게 됨에 따라 25년간 일반에 선보이지 않았던 미인도 전시를 검토 중이다.
지호일 황인호 기자 blue51@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