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책임을 미룬 채 공식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 국민일보가 19일 입수한 국회 국정조사특위 외부 전문가 보고서에는 정부의 정책 실패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원인미상의 폐질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는 정부 역학조사 결과는 2011년 8월 발표됐다. 국조특위 외부 전문가로 참여한 더불어민주당 장하나 전 의원은 보고서에서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을 묻는 국민을 정부가 이른바 ‘뺑뺑이’ 돌린 사례를 여러 건 적시했다. 심지어 살균제 피해 규명 이후에도 이런 행태가 반복됐다. 피해자 배상은커녕 스스로 유해성을 알아보려 한 국민에게조차 제대로 유해성을 설명하지 못한 정부의 직무유기란 비판이 제기된다.
2011년 11월 한 신생아 부모는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보고 젖병세정제가 너무 걱정된다”며 “신생아 입으로 잔류 세제가 들어갈 수도 있으니 점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문의는 보건복지부→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식약청(현 식품의약품안전처)→지경부→복지부→지경부로 연속적으로 이관됐다.
사유도 기가 막히다. 복지부는 “세정제는 지경부 소관”이라고, 지경부는 “식약청 소관”이라고, 식약청은 “의약외품이 아니니 지경부 소관”이라고, 지경부는 다시 “세정제가 아닌 세척제이니 복지부 소관”이라고 책임을 미뤘다. 복지부는 결국 ‘다(多) 부처 민원’으로 분류해줄 것을 요청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지경부는 같은 해 12월 1일 “2종 세척제는 복지부 소관이니 복지부에 물어보라”고 답변했다. 이에 민원인이 불합리한 제도라며 항의하자 2012년 4월 지경부는 다시 같은 내용을 답변하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됐다.
2011년 12월에는 국민신문고에 또 다른 독성 유해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이 들어간 스프레이식 곰팡이제거제에 대한 신고가 들어갔다. 신고인은 “최소한 가습기 살균제와 동일한 제품이니 주의를 요한다는 안내문구는 있어야 한다. 또다시 내 가족이 죽어나가고 실험쥐가 돼야 하느냐”고 썼다. 장 전 의원은 “정부는 KC마크 표시 신고된 제품이니 믿고 쓰라는 몰상식하고 무책임한 답변을 내놓았다”고 비판했다. 이 민원 역시 공정거래위원회→식약청→복지부→지경부로 3차례나 이송됐다.
역학조사 직전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등 살균제 성분에 대해 국민신문고에 문의한 소비자도 있었다. 생후 12개월 아이의 부모라고 밝힌 그의 문의는 지경부→식약청→국민권익위원회→복지부→권익위→환경부→권익위→지경부로 무려 7차례나 소관부서가 변경됐다. 답변은 ‘살균제라면 안전관리 대상이 아니고, 세정제라면 식약청에 문의하라’가 끝이다. 살균제·세정제 구분을 민간인에게 떠넘긴 것이다. 국조특위 관계자는 “만약 이 아이가 살균제 피해를 입었더라도 정부는 제조업체 탓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도 제품 유해성에 대한 항의를 무시했다고 밝혔다. 2000년 옥시에는 “남편, 본인, 아이 모두가 심한 기침과 콧물 등의 증상으로 잠도 자지 못함, 심하게 아픔”이라는 항의가 접수됐다. “머리가 아프고 뼈가 욱신거립니다”(2000년 11월) “4회 이용했는데 눈과 목이 따끔거림”(2009년 11월) 등의 민원이 제기됐지만 적절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그래픽=전진이기자
복지부→지경부→식약청 떠넘기며… ‘뺑뺑이’만 돌렸다
입력 2016-12-20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