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직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 온 “여기까지 해 봤다”
“의사가 키우는 애완견 모임 사회를 맡았습니다.”
“보도 아가씨(호출 접대부) 섭외에 계산까지 하고 모텔 앞에서 기다리다 2차 끝나면 집에 픽업해 드렸습니다.”
제약사가 의사들에게 제공하는 리베이트의 처벌 수위가 강화되고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시행되기도 했지만 이들의 ‘갑을 문화’는 여전하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한국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갑을 문화의 마지막은 의사와 제약사 영업직원들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제약 직군에게만 공개되는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지난달 25일 “제약회사 영업직 여기까지 해봤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제약회사 영업직으로서 겪어야 했던 특이한 상황을 댓글로 붙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제약회사 영업직원들은 댓글을 통해 수십 가지 사연을 진솔하게 털어놨다. 글은 지난주 삭제됐다.
우선 직무와 상관없이 의사 가족의 민원을 들어줬다는 내용이 많았다. 한 영업직원은 “원장이 이사할 때 이삿짐센터 전문요원으로 일했다”며 “결혼기념일에는 선호하는 플로리스트에게서 꽃다발도 사왔다”고 말했다. 다른 직원은 “전해들은 얘기지만 어느 내과 원장님 사모님과 자녀가 산속에서 행방불명돼 영업직원이 지인까지 동원해 찾아냈다”며 “그분은 회사를 그만두고 병원의 전납 도매를 차려 떵떵거리고 산다”고 얘기했다.
직원들은 개원의의 병원 행정 업무를 맡기도 했다. 한 직원은 “병원 보수 공사나 은행 업무, 인사 업무까지 했다”고 말했다. 다른 직원은 “홍보나 판촉 대행, 외래 보조, 쇼핑 대행과 병원 홍보 현수막 설치와 철거, 문전 약국 섭외, 건물주와 월세 합의도 했다”고 덧붙였다. “물티슈 판촉물을 만들고 직접 지하철역에서 돌리기도 했다”며 “물티슈 더 달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워크숍 등으로의 차량 픽업은 빈번했다.
이들은 의사의 사적인 일들도 도맡았다. “원장이 바람피우는 애인이 있는데 둘이 식사하면 사람들 보는 시선도 있어서 제가 끼어서 계산까지 하고 왔다”거나 “맞춤 속옷을 사거나 땀에 범벅돼 자동차 트렁크 안에 한 달 넘게 있었던 옷을 세탁소에 맡기고 찾아왔다”는 내용이었다.
곤란한 일도 많았다. 한 직원은 “의사가 해외 봉사활동을 갔는데 중요한 약을 두고 왔다고 해서 약 상자를 들고 강제로 해외봉사활동 다녀왔다”고 말했다. 또 “가로수가 병원 창문을 가린다고 해서 구청에 민원 넣어 달라는 요청이 왔는데 무시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의사들의 무리한 부탁은 이들의 직업에 회의를 가져오기도 했다. 한 직원은 “눈 오는 날 병원 바닥에 깔 박스를 주워다 줬다”며 “하고 나서 회의감이 참 많이 들었다”고 호소했다. 다른 직원은 “자동차 튜닝을 위해 편도 300㎞ 되는 거리를 차 맡기고 버스 타고 내려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원장 딸 졸업 연주회에 친구를 데리고 가서 자리를 채우고 꽃다발도 전했다”며 “그런데도 늦었다고 혼나기까지 했다”며 씁쓸히 말했다.
심부름 등 노무 제공과 관련된 리베이트는 영업직원들의 진술을 제외하고는 수사할 방법이 없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내부 고발자 포상을 강화해 리베이트를 근원부터 차단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리베이트 의사 ‘면허 취소’ 단 1.2%뿐
김영란법 이후 法 피해가는 꼼수 만연… 음성적인 접대 되레 더 늘었다는 목소리도
의사들은 처방전으로 환자를 치료할 약을 결정한다. 제약사는 대형병원 한곳에서 품목별로 한 달에 수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기도 한다. 제약사 영업직원과 제약 도매상들은 자신들의 매출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의사에게 거역할 수 없는 구조가 형성된다.
◆리베이트 들켜도 면허 취소는 1.2%
리베이트가 적발된 봉직의는 배임수재 혐의를 적용받아 처벌 수위가 높아지기도 하지만, 개원의 등 대부분 의료인은 의료법의 적용을 받는다. 의료법은 판매촉진을 위해 금전 물품 편익 노무 향응 등의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의료인에게 이익을 제공한 이를 처벌하는 규정이 있는 약사법·의료기기법 등을 의료법과 함께 묶어 리베이트 쌍벌제라 부른다. 위반자는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을 처벌받는다.
리베이트가 만연하지만 면허가 취소된 의사는 1.2%에 불과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강석진 새누리당 의원이 보건복지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2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리베이트로 처벌받은 의료인 수는 2276명이었지만, 금고형 이상을 받아 면허 취소가 된 의료인은 27명이었다.
◆김영란법 피하기 천태만상
소액의 리베이트는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의 적용을 받는다. 지난 9월 28일 법이 시행되면서 공립 대학병원과 사립 대학병원에 재직 중인 의사들은 각각 공무원과 교직원에 준하게 됐다. 3만원 이상의 식사나 5만원 이상의 선물을 받을 경우 처벌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일반병원이나 개원의 등은 김영란법에 적용받지 않고, 공무원이나 교직원에 해당돼도 다른 직종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김영란법 8조 3항 “다른 법령, 기준 또는 사회상규에 따라 허용되는 금품 등은 수수 금지대상이 아니다”는 조항 때문이다. 약사법과 의료법이 다른 법령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들 법이 허용하는 견본품 제공, 강연자에 대한 학술대회 지원, 제품설명회 참가에 따른 비용이나 식음료 제공 등의 경제적 지원은 받을 수 있게 된다.
오히려 김영란법이 제품 설명 등 제약업체 영업직원들의 방문활동을 막고 술자리 제공 등 음성적인 접대를 늘렸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제약업계 직원은 18일 “김영란법 시행 이후 잠시 의사들을 접촉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이전과 비슷한 분위기로 돌아왔다”며 “병원 방문이 어려울 뿐 음성적인 접대 술자리는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약업체들은 고급 레스토랑 VIP 회비를 내고 접대 영수증에는 적은 금액이 찍히도록 하는 방법도 동원한다. 온라인으로 제품 설명 수업을 개설해놓고 병·의원서 이를 자동 재생만 해놓으면 상품권을 제공하는 식으로 김영란법을 피해 가기도 한다.
이른바 몸빵이라 불리는 의사들의 과도한 노무 요구도 김영란법으로는 막을 수 없다. 또 차량 픽업이나 가족 심부름 등은 영업직원이 스스로 고백하기 전에는 적발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복지부 관계자는 “통계를 내기에는 이르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제약업계의 리베이트는 확실히 줄었다고 알고 있다”며 “하지만 노무 제공의 경우 따로 통계를 잡고 있지 않고 관계자의 진술 외에는 사실상 적발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했다.
◆근원적 해결책 마련해야
지난 13일 부산지검은 B병원 등 부산 일대 대형병원 4곳을 압수수색했다. 부산의 의사 사회 내부에서 스스로 고발해 이뤄진 수사였다.
지난 9월 제약사 등에서 억대의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의사 1명이 구속된 C병원도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C병원은 의약품의 88%를 품목별 입찰방식으로 구매해 왔지만 내년부터 성분별 입찰률을 65% 이상으로 확대시킬 예정이다. 의약품을 성분별로 입찰하게 되면 의료인 등이 리베이트에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게 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남은경 정책국장은 “리베이트 면허정지 기준이 300만원이기에 실제로 처벌받는 의사는 손에 꼽을 정도”라며 “리베이트 적발은 내부자의 제보로만 이뤄지기 때문에 미국처럼 포상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2년 폐지된 약제비 직불제를 재도입해 공단과 제약사가 약값을 직접 계약하게 하는 등 근본 원인 해결을 하지 않으면 리베이트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일러스트=이은지 기자, 전진이 기자
[단독] “의사들 애완견 모임 사회도 봤다”… 영업직 ‘乙’의 비애
입력 2016-12-19 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