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여명의 군중을 먹이신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성경은 군중을 충분히 먹이고도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나 됐다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은 그 사건 뒤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오묘하고 기적이 놀랍기도 했지만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요 6:26)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먹고 배부른 까닭, 먹고 배부르기 위함은 아닙니까.
사흘 굶으면 도둑질 안 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배고픔은 사람에게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사단의 유혹을 받은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스러움을 느꼈습니다(창 3장). 에서가 장자의 권한을 야곱에게 쉽게 넘길 수 있었던 것도 배고픔 때문이었습니다(창 25장).
먹고 배부른 군중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고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셨습니다(요 6:15). 먹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영생의 양식’을 위해 애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존을 위한 배고픔보다 더 중요한 영혼의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 기분 좋으면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먹어도 허하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진짜 배고픔은 양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도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처럼 헛된 우물질뿐입니다. 몸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진짜 기근이 올 텐데 양식 없는 주림, 물 없는 갈급함이 아닌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라고 외쳤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쳤습니다. 혹시 다른 것으로 헛배가 불러 정작 먹어야 하는 양식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만이 생명의 밥입니다. 예수님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뜻은 재미있게도 ‘떡집’입니다. 생명의 밥으로 오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직접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48). 예수님의 살과 피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늘의 만나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생명의 밥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먹어야 합니다. 먹어야 그 힘으로 움직이고 말하며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것, 즉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해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신 것처럼,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요 6:57).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는 계절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밥이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더 자랑하고 소개해야 합니다. 성탄의 계절, 대림절 시기에 생명의 밥으로 오신 예수님을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승훈 목사 (의정부 성산성결교회)
약력=△서울신학대, 호서대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서울북지방회장 역임 △현 자오나눔 장애인선교회 자문위원, 주나임 장애인선교회 이사
[오늘의 설교] 생명의 밥으로 오신 예수님
입력 2016-12-18 2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