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 그림愛 빠진 ‘화랑가 1번지’

입력 2016-12-18 17:40
학고재갤러리에서 선보이는 허수영 작 ‘잔디01’(2016년, 캔버스에 유채). 한 화면에 레지던시 주변에서 본 4계절 잔디밭 풍경이 켜켜이 겹쳐 있다. 아래 왼쪽은 갤러리현대 기획전에 나온 양정욱의 설치 작품 ‘그는 선이 긴 유선 전화기로 한참을 설명했다’(2016년, 나무·철·모터·실 등). 아래 오른쪽은 아라리오갤러리 6인전에 출품한 박경근의 영상 작품 ‘1.6초’(2016년). 로봇의 생산라인을 1.6초 단축하려던 회사의 결정에 따라 발생한 노사분규를 다뤘다. 각 갤러리 제공

경복궁 옆 서울 종로구 삼청로는 메이저 화랑이 밀집한 ‘화랑가 1번지’다. 박서보 하종현 정상화 같은 원로 단색화 작가, 영국의 유명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 등 국내외 특급 작가들의 전시가 주로 열린다. 최근 이곳 갤러리 3군데서 30∼40대 신세대 작가들의 전시가 모처럼 동시에 열려 젊은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학고재갤러리에서는 허수영(32) 개인전이 열린다. 다양한 장르의 미술이 범람하는 시대에 서울과기대 출신의 허 작가는 정통 회화를 고집한다. 특히 ‘1년’ 시리즈는 여러 군데 레지던시(주로 정부·지자체가 1년 단위로 무료 제공하는 작업공간)를 돌았던 그가 도착해서 정착하고 떠나기를 반복했던 기억을 풍경에 담았다. 그런데 전통의 원근법을 전복하는 방식이라 눈길을 끈다. 시간성과 공간성을 합치시키는 새로운 조형어법이다. 예컨대 봄의 풍경이 맨 바닥에, 여름의 풍경을 그 위에 겹쳐지는 등 한 화면에 계절이 켜켜이 쌓여 있다. 경쟁이 치열한 레지던시를 여러군데 거쳤다는 것은 그가 검증받은 신예임을 의미한다. 내년 1월 8일까지(02-720-1524).

갤러리현대에서는 박경근(38) 양정욱(34) 이슬기(44) 등 3명 작가를 초청한 기획전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를 마련했다. 유망한 작가들을 연례적으로 지원키로 하고 그 포문을 연 전시다. 영화계와 미술계를 넘나들며 주목받아온 박경근은 올해 삼성미술관 리움이 주는 아트스펙트럼상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전시에선 남녀의 삼각관계를 보여주는 영화를 현재 전시가 열리는 장소에서 찍어 선보이는 것으로, 드라마와 현실 사이로 관객을 초대한다. 프랑스 파리와 미국 시카고에서 미술을 공부한 이슬기는 특유의 해학적인 시선으로 일상의 사물을 해석한다. 누비이불을 러시아 작가 말레비치의 추상화처럼 보여주면서 그 안에 속담을 슬쩍 끼워 넣은 ‘이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경원대 조소과 출신의 양정욱은 나무와 실 등을 이용해 ‘이야기가 있는 움직이는 조각’을 선보이는데, 상상력이 기발하다. 내년 1월 15일까지(02-2287-3500).

박경근 작가는 아라리오갤러리에 ‘겹치기 출연’한다. 아라리오에서는 그를 비롯해 김웅현(32) 노상호(30) 박광수(32) 안지산(37) 윤향로(31) 등 6인의 그룹전 ‘직관의 풍경’전을 마련했다. 난해한 현대미술을 머리가 아닌 직관으로 느끼기를 제안하는 전시이다. 박경근은 노사분규를 통해 학습된 ‘작업 박자’와 그 반복에 길들여짐으로써 새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는 영상을 내놓았다. 안지산과 박광수의 회화는 보는 즉시 특유의 시각적 불편함이나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윤향로와 노상호는 인터넷 등에서 떠도는 이미지를 수집해 설치와 회화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김웅현 역시 이미지를 수집해 짜깁기한 영상으로 북한과 관련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내년 1월 22일까지(02-541-5701).

이들 화랑이 젊은 작가전을 잇따라 연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갤러리현대 도형태 대표는 “최근 2∼3년은 원로 작가 전시에 집중한 측면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시장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메이저 갤러리에서도 신진작가의 전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술기획자 A씨는 “메이저 화랑들이 기성작가 뿐 아니라 아직 마켓이 형성되지 않은 젊은 작가들에 관심을 쏟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라면서도 “단색화 이후의 시장 창출을 위해 ‘신상품 개발’의 의미가 클 것”이라고 진단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