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혁명 공약’ 따옴표 빼 보통명사화… 5·16=혁명 유도

입력 2016-12-16 00:02
기호학자인 한양대 이도흠 교수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호의적으로 다뤄진 사실은 교육부 내부에서도 일정 부분 수긍한다. 온도차는 있다. 종전 교과서들이 너무 야박했으므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췄다는 변론도 존재한다. 교육부 장관이 저작권을 갖는 국정 교과서이므로 대통령 아버지에게 후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시각도 없지 않다.

박 전 대통령은 어떻게 호의적으로 쓰였을까. 국민일보는 기호학자인 한양대 이도흠 교수에게 박 전 대통령을 다룬 261∼269쪽(고교생용)에 대한 분석을 의뢰했다. 기호학은 언어기호로 이뤄진 글(텍스트)의 구조의 의미, 해석과 소통에 대해 분석하는 학문이다. 이 교수는 “미화의 전형적 수법인 ‘은폐와 분식(粉飾)’이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5·16을 혁명으로 쓰고 싶은 교과서

5·16 군사정변을 다룬 “군사정변의 주도 세력은 혁명 공약을 발표하고” “군사정변 주도 세력은 혁명 공약에서 민정 이양 후”(261쪽) 두 문장은 5·16 군사정변을 혁명으로 읽히도록 유도하고 있다. ‘혁명 공약’은 박 전 대통령 등이 발표했던 하나의 문건이다. 따옴표 처리해 고유명사로 처리해야 오해가 없지만 보통명사처럼 쓰였다. 일반적인 혁명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사용됐다는 뜻이다.

이는 군사정변이란 가치중립적인 용어와 결합해 ‘5·16=혁명’이란 등식이 만들어지도록 유도한다. 정변이란 말은 얼핏 비판적 용어로 들리지만 갑신정변의 예에서 보듯 쿠데타보다 가치중립적이다. 본문에서는 누락했지만 ‘역사돋보기’라는 코너에서는 ‘이른바 혁명 공약’이라고 표현해 비판을 모면하려 했다.

국정 교과서는 사회적 혼란, 장면 정부의 무능, 공산화 위협 등 5·16의 불가피성을 부각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민정 이양 약속을 어긴 부분에 한정됐다. 민주주의 유린이나 32년간 이어진 군사독재의 지평을 연 점 등은 거론하지 않았고, 비판적인 부분은 긍정적인 부분을 충분하게 서술한 뒤 한두 문장 정도로 처리했다. 군사정변을 주도한 사람들이 책을 만들 때나 가능한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동백림 사건서 나타난 ‘은폐와 분식’

문장의 의미는 문맥에 종속된다. 예컨대 “말을 바꾸었다”란 문장이 경마장에서 쓰이면 “동물인 말을 바꿔 탔다”, 장기판이라면 “장기말을 바꿨다”, 대화에 관한 글이라면 “언술을 바꿔 말했다”로 읽힌다. 박 전 대통령 시대에 있었던 공안 조작 사건들은 이런 문맥의 힘을 통한 정당화가 시도됐다.

동백림 사건을 설명한 “1967년 7월 동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을 중심으로 (중략) 동백림 사건이 있었다”(263, 264쪽) 등의 문장은 ‘계속되는 안보 위기’란 단락에서 북한의 대남 도발과 당시 우리 정부의 대응을 설명하는 한복판에 배치했다. 대남 도발과 그 대응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박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 시나리오 속에서 발생한 ‘6·8 부정선거’와 이에 항의하는 학생·지식인을 탄압하는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란 점은 은폐됐다.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 내지 정부비판 행위가 간첩죄로 조작됐다는 사실이 나중에 확인됐다는 역사적 사실도 기술하지 않았다. 만약 이런 맥락 속에서 동백림 사건을 서술했다면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역사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

치적은 부각, 비판은 구색만

국정 교과서는 박 전 대통령의 성과를 충분하게 기술한 뒤 부정적 평가는 뒤에 짧게 구색만 갖추는 방식으로 쓰고 있다. 인권탄압처럼 어두운 면은 경제 성장과 안보 위기를 설명하는 부분에 넣어 희석하려 했다. 예컨대 ‘수출주도의 경제 개발 체제’ 단락(264쪽)을 보면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다룬 마지막 세 문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9개 문장에서 치적을 강조했다. 경제기획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만들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포항제철을 세웠으며, 수출주도형 경제 정책을 폈다는 부분이다. 정경유착, 부패, 빈부격차 심화, 산업구조의 기형화 등 수출 주도의 경제개발 체제의 어두운 면은 가렸다. 새마을운동이나 녹화사업, 그린벨트 등도 비슷하다. 새마을운동은 “유신 체제 유지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268쪽) 한 문장만 빼고 “2013년 유네스코에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 등 긍정적인 면만 나열했다.

이 교수의 교과서 분석 전문은 인터넷 국민일보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글=이도경 기자 yido@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