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8월 9일 사임했다. 상원의 탄핵안 의결이 확실시되자 먼저 사직서를 내던졌다. 미국 최초의 탄핵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정·부통령제라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같은 날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포드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아니라 정식 대통령이 됐다. 당시 미국 상황은 현재 한국과 흡사하다. 대통령이 직접 관여된 게이트로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경제도 엉망이었다. 당시 미국은 중동 국가의 자원 민족주의에서 촉발된 오일 쇼크로 휘청됐다. 국민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다. 종전 단계에 접어들었던 베트남 전쟁 영향이 컸다. 중앙정보국(CIA)과 국방부는 공작과 정보 조작, 무능함의 대명사가 됐다.
포드 대통령은 전임자 닉슨과 다른 길을 걸었다. 백악관에 미 의회 흑인의원 모임을 초청했다. 여성 인권확대 지지자들을 만났다. 노조 대표들과 머리를 맞댔다. “백악관이 닉슨 적들의 놀이터가 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포드 지지율은 71%까지 올랐다.
하지만 포드는 “이런 인기가 영원히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알 만큼 정치를 오래했다”고 토로했다. 그 시간이 너무 빨리 왔다. 계기는 8월 28일 포드의 취임 첫 기자회견이었다. 포드는 경제를 포함한 많은 현안을 준비하고 나왔다. 하지만 기자들은 닉슨의 사법처리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포드는 회고록에서 “바로 그 기자회견부터 닉슨 사면을 진지하게 고려했다”고 썼다.
포드는 취임 한 달을 맞는 9월 8일 닉슨 사면을 발표했다. 그의 지지율은 순식간에 폭락했다. 언론은 포드에게 비난을 쏟아냈다. 포드와 닉슨의 ‘사면 밀약설’이 제기됐다. 사면을 전제로 닉슨이 사임하고 포드가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는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포드는 닉슨 사면을 추진할 정치적 힘이 없었다. 닉슨 사면으로 자신까지 위기에 빠졌다. 국정은 다시 뒤죽박죽이 됐다. “포드를 감옥으로 보내자” “포드를 탄핵하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포드의 결정이 옳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닉 래곤은 저서 ‘대통령의 결단’에서 “포드가 닉슨 사면으로 워터게이트를 종식시켰다”고 썼다.
포드는 1976년 11월 대선에서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워터게이트와 베트남 전쟁에 염증을 느낀 미국 국민들은 카터를 택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카터는 해군 장교로 근무한 뒤 가업인 땅콩농장을 경영했다. 정치적 경력은 조지아주 상원의원과 조지아주 지사를 지낸 게 전부였다. 중앙정치의 때가 묻지 않은 게 가장 큰 무기였다. 미국 언론들은 카터의 승리 요인이 ‘워싱턴 냄새’가 가장 나지 않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국민일보가 창간 28주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7.8%가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 사법처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주사를 좋아하는 ‘청담동 아줌마’에게 권력을 갖다 바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포드는 워터게이트에 속죄하며 ‘반(反)닉슨’ 노선을 택했다. 그래서 닉슨 사면이라도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와대와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 진영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면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국민들은 새누리당 비주류들도 한통속으로 보고 있다. 야당은 “마치 대선에서 승리한 것처럼 행동한다”는 비판을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바람’을 등에 업었던 카터가 포드에게 이길 때 득표율 격차는 2.06% 포인트밖에 나지 않았다.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
[세상만사-하윤해] 닉슨 사임 그 이후
입력 2016-12-15 1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