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갈급한 가치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열풍을 일으키고 2016년 촛불시위 광장에서 터져 나온 ‘정의로운 국가’에 대한 요청은 정의가 부재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도시계획 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The Justice City’(2010년)라는 책을 통해 ‘정의도시’라는 개념을 창안한 수잔 파인스타인(78)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서울을 방문, 13일 박원순 서울시장과 대담을 가졌다. 파인스타인 교수가 학술적으로 정의도시를 정립해 왔다면 박 시장은 행정을 통해 정의도시를 실험하고 있다.
‘정의도시’란 정의라는 도덕철학적 가치를 도시계획에 적용한 것으로 지방정부의 공공투자나 개발정책이 사회적 약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파인스타인 교수는 “지방정부 차원에서 주거 문제나 토지 사용, 대중교통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면서도 “토지 투기를 막는다든가, 젠트리피케이션(둥지내몰림)으로 인한 투기적 이익을 규제한다든가, 대중교통 요금을 낮게 유지한다든가 도시 차원에서도 해볼 수 있는 일들이 많다”고 주장했다.
파인스타인 교수는 한 예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으로 위기를 맞은 최저임금제를 거론했다. 그는 “트럼프가 당선된 후 미국의 불평등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다. 특히 트럼프가 최저임금제를 반대하는 것이 큰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이 불평등 해소에 굉장히 중요하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노력을 하는 게 지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시는 법정 최저임금보다 높은 생활임금을 적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 시장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한계상황에 직면한 시민들을 케어하고 지원하는 게 시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파인스타인 교수 견해에 적극 동의했다. 이어 “중앙에 재정과 권한이 집중돼 있는 게 사실”이라며 “지방분권은 ‘저스티스 시티’의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파인스타인 교수는 미국과 싱가포르 사례를 자주 인용했다. 그는 “코네티컷 주에 가보면 로컬 가게들만 들어올 수 있는 상업지구가 있다. 스타벅스 같은 거대자본은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거대 유통업체를 허용하지 않고 작은 가게들만 들어올 수 있는 상업지구를 만드는 것도 정의도시를 실천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 시장은 “서울시가 참고할 만한 얘기”라고 평가했다. 또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끝없이 높여나가니까 좋은 가게들이 쫓겨나서 그 지역이 황폐화되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도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박 시장은 “임대료 상한선을 제한하는 정책적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면서 “1대 99의 사회를 시정하라는 게 국민의 목소리인데 이런 게 제도적으로 수용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파인스타인 교수는 “미국에서도 어떤 도시에서는 상업적 부동산을 규제하고 있다”며 “임대료를 2배, 3배로 올리지 않도록 하는 건 필요하다. 임대료가 크게 올라간다면 지속가능한 삶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 박 시장의 견해를 지지했다.
정의도시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저항과 반발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의견을 나눴다. 박 시장이 “개발중심주의, 성장물신주의가 여전한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서울시의 인본주의와 충돌하고 있다”고 고민을 피력하자 파인스타인 교수는 “진보적 목표가 항상 일관되게 추진될 수는 없다. 사람들의 저항이나 역풍이 있기 마련이다. 시민 참여는 이런 저항을 막는 방법이 된다”고 조언했다.
파인스타인 교수는 끝으로 “미국에서도 많은 시장들이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시장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정책을 펼치고 있다”며 박 시장을 격려했다. 그는 “시장이나 정치인이 어떤 목소리를 내는가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며 “상업자본에게 지원금을 제공하고 도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정의로운 도시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건 굉장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파인스타인 교수는 이날 오후 서울시립대가 주최한 ‘서울도시포럼’에 참석, ‘불균등과 정의로운 도시’를 주제로 90분간 강연했다.
글=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사진=구성찬 기자
[단독] “공공투자·개발정책, 사회적 약자 배려해야”
입력 2016-12-14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