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힘에 부친 듯 고개를 떨구고 있다. 고통 때문에 섬뜩할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이다.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퀭한 눈에선 피눈물이 흐른다. 가시관을 쓴 그는 예수다.
가로 3m가 넘는 500호 대형 캔버스를 예수 얼굴 하나로 가득 채운 대작을 배경으로 서 있는 권순철(72) 작가. 그의 선한 눈빛에서 피를 토하듯 작품을 제작했을 지나온 시간들이 읽혀졌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저도 모르게 앗, 외마디가 나오며 이내 옷깃을 여미게 된다. 사방이 예수 얼굴과 십자가, 기도하는 사람을 그린 ‘성화’로 가득 찼다. 현대 미술 작가가 중세시대를 방불할 이런 주제를 가지고 전시를 여는 것은 이례적이라 사연이 궁금했다. 국민일보 창간 28주년 기념으로 본보와 가나아트가 공동기획한 권순철 개인전 ‘영혼의 빛-예수’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평창 30길 가나아트 갤러리에서 지난 13일 작가를 만났다.
그는 민중미술 작가로 분류되어 오던 사람이다. 고(故) 오윤, 신학철, 김정헌 등과 어울리며 1980년대를 뜨겁게 보냈던 그는 한국의 산과 강, 만고풍상을 겪으며 살아 온 촌로와 촌부의 얼굴 등 시대의 표정을 두터운 마티에르와 거친 붓 터치로 담아냈다.
그런 그가 왜 예수를 그리게 된 것일까. 아내, 먼저 간 아내 때문이다. 작가는 4년 전 암으로 아내를 잃었다. 39세에 만나 첫 눈에 반했던 아내, 12살 어려 더 예뻤던 아내에 대해 그는 “저보다 감각과 재능이 더 뛰어난 도예 작가였지만 고달픈 프랑스 파리 생활에서 두 자녀를 키우며 부부가 함께 작업하기는 벅찼다. 나를 위해 예술가의 삶을 접어야 했다”고 말했다.
“아직도 실감이 안나요. 처음엔 충격이 커 몰랐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 생각이 더 간절해지니….”
어쩔 줄 모를 고독과 깊은 상실감의 끝에서 그는 신앙이라는 외줄에 매달리게 됐다. 그도 교회는 다녔으나 아내 손에 이끌려 건성으로 다녔었다. 잔소리처럼 들렸던 “예수 좀 제대로 믿어라”는 아내의 간구는 세상을 떠난 후에야 실현이 된 것이다.
그렇게 2, 3년 전부터 화폭에 담아온 500호 대작을 비롯한 크고 작은 예수 얼굴 시리즈 20여점, 깊고 고요한 메시지를 담은 십자가 시리즈 4점, 일기 쓰듯 스케치북에 담은 예수 드로잉 10여점 등 40여점이 전시장에 펼쳐졌다. 사후에야 소원을 들어준 절절한 사부곡인 셈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아내가 뭐라고 할 것 같냐고 물었더니 “허허”하고 웃기부터 먼저 했다. “이걸 예수 얼굴이라고 그렸냐고 질책하겠지요.”
예술 동지이기도 해 따끔한 비평을 아끼지 않았던 아내는 그가 화가로 대성하는 데 버팀목이 됐다. 먼저 떠난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더 열심히 그렸다고 했다.
예수의 얼굴은 고통 속에서도 성스럽게 빛나야 한다. 붓질을 하다가도 나이프로 물감을 짓이기다가도 이게 아니다 싶으면 몇 시간이고 앉아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잡히지 않는 예수의 얼굴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집중하게 되면 칠이 대담해져요. 정신이 고양되면 생각도 못했던 표현적 요소가 나오지요. 이론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아경인 거지요.”
그가 그린 예수의 얼굴은 인자함이 아니라 대속의 고통과 고뇌, 비애 그 자체다. 물감을 켜켜이 2cm는 족히 되게 두텁게 바른 십자가는 고통의 응축 같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와 삼촌을 잃은 개인사적 고통에 머물지 않고 촌로, 촌부, 위안부 등 시대의 고통을 담은 얼굴을 그려온 그였기에 예수 시리즈도 시대적 고통을 시각화해온 작가의 예술세계와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다.
최근 최순실 게이트와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탐욕과 비리에 대해서도 일침을 잊지 않았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잘못됐어요. 예수는 말구유에서 태어나고 목수 일을 하며 밑바닥 삶을 사셨지요. 그 말구유 정신을 배워야 해요. 기업가들도 나눔의 정신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이번 전시는 일그러진 한국 사회가 다시 한번 내면을 성찰하고 응시할 것을 권하는 듯하다. 16일부터 내년 1월 15일까지(02-720-1020).
■ 권순철은 경남 창원에서 출생해 상주 대구 등지에서 자랐다. 서울대 회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89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이후 재불작가 모임인 ‘소나무회’를 이끌었고,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1992년 이중섭미술상, 2013년 KBS해외동포상 수상.
글=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인터뷰] 권순철 “일그러진 한국사회, 내면 성찰할 계기됐으면…”
입력 2016-12-14 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