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병 아동 소원 이뤄주기] ‘일일 요리사’ 소원 푼 백혈병 환아, 병 딛고 조리사 꿈꿔

입력 2016-12-14 04:00
여현우군은 지난 9월 난생처음 친구들과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 놀러가는 소원을 이뤘다(왼쪽 아래 사진), 오른쪽 작은 사진은 김서연씨가 2년 전 삶의 멘토 대니얼 고트립 박사를 만나는 장면. 요리사 샘킴, 탤런트 전혜빈, 골퍼 박인비 선수는 재능 기부로 난치병 아동들을 후원하고 있다.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제공
손병옥 메이크어위시재단 이사장


여현우(11·전남 여수)군은 지난 9월 초 학교 친구 10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난생 처음 회전목마와 범퍼카를 신나게 탔다. 선천성 심장병인 대동맥판막협착증을 앓고 있는 현우는 조금만 오래 서 있거나 걸어도 숨이 찬다. 그래서 학교 갈 때를 빼곤 대부분 시간을 집 안에서 혼자 보낸다. 그런 현우가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친구들과 에버랜드 놀러가기였다. 이런 사정을 안 병원의 주선으로 ‘한국메이크어위시(MAKE-A-WISH)재단’과 연결됐고 현우는 그토록 바라던 소원을 이루게 됐다. 현우 어머니(35)는 “말수 적고 조용한 아이가 에버랜드를 갔다 온 뒤 목소리도, 행동도 커진 것 같다”면서 “‘넌 아프니까 이건 하면 안 돼’라고 얘기하던 친구들이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걸 보고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국내 유일의 소아 조로증(早老症·조기 노화 증상) 환자인 홍원기(11)군은 영화 ‘아이언맨’의 주연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아이언맨을 연기한 그의 몸이 탄탄해 보이고 유약한 자신에겐 가장 큰 사람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란다. 지난 7월 홍군의 사연을 접한 메이크어위시재단은 배우 측과 접촉 중이며 내년 쯤 만남이 성사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3500여 희귀난치병 환아에 ‘특별 선물’

메이크어위시재단은 이처럼 생명을 위협받는 희귀·난치병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소원 성취’를 통해 삶의 희망과 용기, 기쁨을 전하고 있다. 단순히 의료비 지원보다는 오랜 투병생활로 지친 아이들의 심리·정서적 지원에 집중하는 게 다른 사회공헌 기관과 다른 점이다.

메이크어위시재단은 ‘명예 경찰관’ 소원을 이루고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 7세 백혈병 소년을 기리기 위해 미국 애리조나주 경찰관과 소년의 어머니가 함께 1980년 설립한 게 시초다. 이후 세계 50개국에서 지금까지 35만여 난치병 환아의 소원을 이루는 기적을 낳았다.

2002년 11월 설립된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은 2003년 1월 ‘1호 위시키드(Wish Kid)’를 시작으로 지난 11월 말까지 14년간 3512명에게 소원 성취의 감동을 선사했다. 재단 대외협력팀 한아름씨는 “매년 320∼330명의 아이들이 소원을 이루고 있으며 100여명이 늘 기다리고 있다”면서 “대부분 백혈병과 림프종, 골육종, 뇌종양, 신경모세포종 같은 힘든 병마와 싸우고 있다”고 했다. 소원 성취 대상자(만 3∼18세)가 되면 재단에 등록돼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파견돼 짧게는 한 달, 길게는 6개월 넘게 아이와 교감하며 소원 성취 방식을 고민하고 준비한다. 1명당 소원 성취에 드는 비용은 대략 380만∼400만원으로 전액 후원금으로 조달된다.

‘위시 키드’가 ‘위시 메이커’로

난치병 환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일에는 생애 최고의 감동을 선물하기 위해 힘쓰는 자원봉사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매년 1700여명의 자원 봉사자가 ‘위시 메이커(Wish Maker)’로 나서고 있다. 과거 ‘위시 키드’였다가 ‘위시 메이커’로 활동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근육기능이 상실되는 척수성근위축증을 앓는 김서연(23·여)씨는 2년 전 삶의 멘토였던 미국의 상담심리학자 대니얼 고트립 박사를 만났다. 김씨는 “나와 같은 신체장애를 가진 박사님과의 만남은 가장 행복하고 따뜻한 순간이었고, 장애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깨우쳐줬다”고 회상했다. 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하는 그는 재단에서 아이들의 아픈 마음을 읽는 ‘위시 앰버서더(상담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림프구성백혈병으로 투병했던 변상호(22)씨도 13세 때 ‘일일 요리사’ 소원을 이룬 뒤 병을 극복하고 대학에서 한식 조리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 그 역시 ‘위시 에인절(대학생 봉사자)’로 뛰고 있다.

유명 스포츠인이나 연예인들은 기부금이나 재능 기부로 동참하고 있다. 골프 여제 박인비 선수는 2008년부터 버디를 할 때마다 2만원씩 적립해 기부하는 등 지금까지 9000만원이 넘는 후원금을 냈다. 축구 구자철 선수, 탤런트 전혜빈, 요리사 샘킴 등은 재능 기부로 아이들의 꿈 지킴이가 돼 주고 있다. 푸르덴셜생명보험과 삼성전자DS, 얀센, 디즈니 등 매년 30여개의 후원 기업과 2000여명의 소액 기부자들은 난치병 아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소원 성취는 어떤 효과를 냈을까. 재단 측이 소원을 이룬 난치병 아이 및 부모 330명을 조사해 보니 96.7%가 “아이의 심리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93.7%는 “소원 성취가 아이 치료에 도움이 됐다”고 답했다. 93.3%는 “소원성취가 가족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재단 김유경 부장은 “난치병 아동들은 소원을 이루는 순간, 아픈 현실도 잊고 건강했을 때처럼 즐겁게 웃고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서 “이런 기쁨의 순간은 면역력을 높여 투병 의지를 회복하고 병과 싸워 이겨내는 희망의 기적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손병옥 메이크어위시재단 이사장
“소원 이뤄 본 아이들, 병과 싸워 이겨낼 용기 얻죠”


“9년 전 앙드레 김을 만난 한 아이가 디자인을 전공하는 어엿한 여대생이 되어 전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생명을 부지하며 오늘만을 살던 내가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됐어요. 치료 중 힘들고 지칠 때, 입시준비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소원을 이뤘던 순간이 생각났습니다’고 하더군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손병옥(64·사진) 이사장은 13일 난치병 아이들에게 있어 ‘소원 성취’의 의미를 묻자 이같이 답했다. 그는 “소원을 이룬다는 것은 삶의 희망과 병을 이겨내는 용기를 주고 그 아이의 가족과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 전체에 긍정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했다.

손 이사장은 2002년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설립에 산파 역할을 했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푸르덴셜생명보험은 재단 설립 초기부터 임직원 급여 일부를 떼어 기부하고 자원봉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는 “재단 설립 초기만 해도 아픈 아이에게 소원 성취가 갖는 정서적 의미와 효과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을 뿐 아니라 경제·의료적 지원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소원 성취의 감동을 전하자’는 목표로 추진한 결과 첫해 26명에 불과하던 소원 성취 활동이 지금은 매년 300명을 넘어서고 있다”고 전했다.

손 이사장은 난치병 아동들이 매년 꾸준히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데는 많은 후원기업과 개인후원자, 자원봉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최근 계속된 경제불황과 국민 정서 불안으로 후원의 발길이 줄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어 “난치병 아이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소원 성취를 통해 밝은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계속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국민일보와 재단의 공동 캠페인 ‘프레이포위시스(Pray for Wishes)’에 대한 기대감도 내비쳤다. 손 이사장은 “국민일보의 지향점은 난치병 아동에게 소원 성취를 통해 희망, 용기, 기쁨을 전하고자 하는 재단의 가치와 닮았다”면서 “이런 가치에 공감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난치병 아동이 전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와 소원 성취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