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한 심리 위해 盧때 없었던 ‘준비절차’ 진행

입력 2016-12-13 04:01

초유의 ‘피의자 대통령’ 탄핵심판에 착수한 헌법재판소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심판 당시에는 쓰지 않았던 ‘준비절차’ 카드를 꺼내들었다. 헌재 심판규칙에 근거한 준비절차는 복잡한 사건에서 효율·집중적 심판 진행을 위해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를 미리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진행된다. 표면적으로는 2004년에 비해 하나의 심리절차가 늘어난 셈이지만, 당시보다 쟁점이 많은 점을 감안, 재판을 신속히 진행하기 위한 결정이라는 게 헌재의 설명이다.

노무현 때엔 없던 준비절차

헌재는 12일 박한철(63·사법연수원 13기) 소장 주도하에 재판관회의를 열고 준비절차를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효율적 심리를 위한 준비절차는 일종의 변론 예행절차로서 법원의 준비기일과 비슷하다. 헌재 관계자는 “쟁점이 많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모여 중복 내용을 모으기로 사전 조율하는 등 결국 변론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절차”라고 말했다.

헌재는 16일까지가 기한인 박근혜 대통령의 답변서 제출 이후 다음주 중반쯤 준비절차에 돌입하기로 잠정 계획을 세웠다. 재판장(헌재소장)이 지정하는 수명(受命)재판관이 준비절차를 주도하는데, 주심 강일원(57·14기) 재판관을 포함해 2∼3명이 절차를 담당할 방침이다. 준비절차에서 작성되거나 제출된 모든 서류는 별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사건번호가 따로 부여되거나 별도의 기록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준비절차는 2004년 3월 헌재가 노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을 할 때에는 없던 과정이다. 당시에는 바로 변론기일을 지정, 공개변론 등 본 절차가 시작됐었다. 이에 대해 헌재는 오히려 쟁점 정리 등 신속성을 기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2004년의 사례에서는 사실관계가 비교적 확립돼 있었지만, 현재는 박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사상누각이라 비난할 정도로 시비가 큰 상황이다.

관련 기록의 양이 방대하고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맞섰던 2014년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심판 사건에서도 헌재는 준비절차를 택했었다. 헌재 관계자는 “당사자들이 모여 준비절차를 거치면 변론 횟수가 줄어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 심리한다”는 헌재

탄핵소추의결서에 적시된 박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헌법 위반 13개, 법률 위반 5개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다. 이에 대해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인정이 된다면 나머지는 더 볼 것 없이 인용 판결이 가능하다”는 헌법학계 일부의 의견이 있었다. 국회가 의결한 탄핵심판 청구내용을 기각하기 위해서는 쟁점 전부를 심리해야 하지만, 심리 중 한두 가지 중요 사유만 인정되더라도 박 대통령의 파면 결론은 빨리 나올 수 있는 것 아니겠냐는 관측이었다.

신속한 결론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헌재지만,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는 근거를 알 수 없다며 반박했다. “전체를 다 따질 필요 없다”는 견해는 대통령 파면 결론을 전제한 섣부른 주장이라는 시각이었다. 헌재 관계자는 “집중심리나 선별심리라는 용어 자체도 불분명하다”며 “탄핵사건은 변론주의가 원칙인데, 주장을 무시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인용 결정 시 한두 가지 사유로 판단을 설시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그저 ‘결정문의 기술’에 가깝고, 본안 판단은 모두 한다는 것이 헌재의 공식 입장이다. 헌재 관계자는 “당사자들의 합의가 없는 이상은 탄핵 사유에 대해 판단을 다 하게 된다”고 말했다. 다만 준비절차에서 중복된 탄핵사유 등이 정리되는 경우에는 탄핵소추의결서에 제기된 중 재판관 판단 과정에 생략되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

전례 따른 잰걸음

헌재는 이날 국회와 법무부에 의견조회를 요청키로 결정했다. 구체적인 특정 내용을 질의해 응답을 받는 방식은 아니며, 쟁점 법안의 입법 경위 등을 회신받는 일반적·형식적 절차로 전해졌다. 법무부에 대한 의견조회가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본부의 수사 자료를 건네받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지만 헌재는 부정했다. 헌재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에도 의견조회를 진행하지 않았다.

헌재는 전례를 따라 조만간 헌법연구관 20여명 규모의 테스크포스(TF)를 구성, 재판관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TF는 2004년의 대통령 탄핵심판 사례, 해외 탄핵사례 등을 폭넓게 검토한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