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예술이 만난다… 작가들의 골목길 아지트

입력 2016-12-12 00:00 수정 2016-12-13 17:12
지난 5일 서울 마포구의 ‘합정지구’ 전시장 앞을 동네 주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사람들과의 교류가 활발하다. 합정지구처럼 작가들이 운영하는 갤러리를 뜻하는 신생공간이 2, 3년 전부터 서울의 변두리 지역에 생겨나고 있다. 구성찬 기자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명성빌딩.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망원역 쪽으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전형적인 주택가 상가건물이다. 옆에는 미용실과 슈퍼마켓, 뒤에는 사우나와 시장이 있는 특징 없는 이 건물 1층에 놀랍게도 갤러리 ‘합정지구’가 있다. ‘백야행성’이라는 기획전 포스터가 붙어 있는 갤러리 앞으로 아이 손을 잡은 주부가 지나갔다.

전시장엔 독립 큐레이터 이현(25)씨가 기획한 박광수(32) 이제(37) 양유연(31) 최한결(31) 등 30대 작가 4인의 회화·비디오·설치 작품이 놓여 있다.

합정지구는 미술인들 사이에서는 ‘신생공간’이라 불리는 전시공간이다. 화상(畵商)들이 아니라 작가들이 운영 주체라는 게 특징. 2∼3년 전부터 임대료가 싼 서울 변두리 지역에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제 합정지구 대표는 국민대 회화과를 나왔다. 2004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5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합정지구를 꾸려가느라 작품 활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그는 “겨우 한숨 돌리고 처음 작품전에 참여했다”며 웃었다

“미술시장 침체는 계속되고 세월호 사건까지 터지며 무력해 있던 시기였어요.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었는데, 63빌딩 스카이아트갤러리에서 작가지원 상금 1200만원을 받았어요. 이 돈을 한번 써보자 싶었지요.”

2015년 1월, 망한 카페 자리를 보증금 1000만원, 월세 70만원을 주고 임대한 합정지구는 그렇게 생겨났다. 뜻을 같이 한 30대 작가 6명이 함께했다. 전시 때마다 도록 제작, 작품 설치, 영상 기록 등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작가들이 재능을 교환하는 식으로 돈들이지 않고 해결한다. 이를테면 전시장 인테리어로 생계를 해결하는 권용주 작가가 전시 디스플레이를 해주고, 홍철기 사진작가가 전시 사진을 찍어 도록을 만들어주는 식이다. “작가들의 연구모임 장소로 쓰면서 전시도 하면 좋겠다고 가볍게 시작했는데, 이렇게 커졌어요.”

합정지구는 월 1회씩 꾸준히 전시를 연다. 작가 발굴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올 들어서는 지하 1층에 전시공간을 하나 더 마련했다. 선정 기준을 물었더니 이 대표는 “미술관 같은 제도나, 상업적 자본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러니까 팔리는 그림보다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려는 작가, 혹은 작가로서 질문이 많은 사람…”이라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상업화랑에 진출을 못하는 게 아니라 진입 여부에 우리 스스로 자유로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곳에서 올 봄 전시를 연 주황 작가는 패션기업 루이까또즈에서 운영하는 강남 플랫폼 엘 컨템포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다. 여기 전시를 대형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눈여겨본다는 얘기다. 작품도 꽤 팔린다고 한다.

주택가에 위치한 만큼 지역 주민과의 커뮤니티도 활발하다. 창작교실 ‘지구화실’에는 회사원 주부 중고생 등이 참여해 그야말로 창작 작업을 한다.

합정지구와 같은 신생공간은 현재 기고자(마포구), 케이크갤러리(중구), 아카이브 봄(용산구) 등 20여곳이 있다.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휘발되듯’ 사라진 곳도 있지만 월간 미술세계 12월호가 신생공간을 점검하는 특집을 실을 정도로 미술계에서 하나의 현상이 됐다. 독립기획자 홍태림씨는 “신생공간이 경제력 부족 탓에 도시 주변부에 생겨나고 있지만, SNS 홍보를 통해 자생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미술기획자 이영욱 전주대교수는 “신생공간은 작가들 간의 강한 네트워크가 강점이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품앗이’를 하며 버티어왔다”면서 “그러나 지속성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품앗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글=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사진=구성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