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면 ‘내려놓음’이 아닐까 한다. 대통령의 하야와 탄핵이 세인들의 입에마저 오르내리는 작금의 현실은 이념과 사상, 정치적 성향을 뛰어넘어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물음표를 던진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도서 3장 1∼2절) 성경대로라면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안다는 건 복된 일임에 틀림없다. 인류의 흥망성쇠 역사 속에서도 진퇴의 시기를 깨닫지 못한 채 사라져간 이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떠나야 할 때를 안다는 건 무엇일까. 지난날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내려놓음’에 직면했던 이들의 삶을 돌아봤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대한민국 건국 … 내려놓음 제때 실천 못해 불행
이승만(1875∼1965)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그는 1899년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된 한성감옥에서 예수를 만났다. 사형을 언도받고 추운 겨울 동사 직전까지 갔을 때 ‘배재학교 때 영어공부를 위해 배운 예수님, 저를 만약 살려주신다면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서원기도를 했다. 이때 강력한 성령 체험을 했다.
석방 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1919년 9월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됐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독립을 위한 외교전을 펼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했고 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됐다.
조국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헌신한 공로가 컸던 만큼 국부(國父)로 추앙받을 수 있었지만 ‘내려놓음’을 제때 실천하지 못해 불행한 말로를 맞았다.
기회는 많았다. 한국전쟁 중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52년에 연임한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56년과 60년 두 번의 기회가 더 있었다. 초대 4년이나 2대까지 8년만 재임하고 물러났으면 그에 대한 평가가 지금처럼 박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없앤 ‘사사오입’ 개헌을 밀어붙인 데 이어 56년 3대 대통령에 올랐고, 60년에는 4대 대통령까지 도전했다. 이미 대중적 지지와 신뢰를 상실한 상태였기에 집권 자유당과 정권은 반공개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대대적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마산에서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하다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군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발견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9일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대됐다. 강경 진압에 나섰지만 군과 경찰의 마음도 이미 돌아선 상태였다. 26일 또다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그제야 더 버티지 못하고 이 전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에도 한국교회에도 매우 불행한 사건이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아데나워 독일 초대 총리
헌법 초안 만들고 ‘라인강 기적’ 일궜지만 국민 뜻에 따라 자리 떠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지성에는 한계를 두면서도 어리석음에는 한계를 두지 않은 건 불공평하다.”
이처럼 재치 있게 인간성을 비평한 이는 독일 초대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1876∼1967)다. 쾰른시장이었던 아데나워는 1933년 나치 집권 후 시장직을 박탈당했고 핍박을 받았다. 44년 히틀러 암살미수 후 나치 반대 인사라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듬해 종전 후 기독교민주당(CDU) 창당에 참가, 당수가 됐고 제헌의회 의장으로서 헌법을 초안했다.
49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연방의회에서 단 한 표 차이로 과반을 득표해 초대 총리로 인준받았다. “내가 나에게 던진 그 한 표가 나를 총리로 만들었다.” 농담 같은 진담이었다.
총리로 재임한 14년 동안 아데나워는 전후 폐허가 된 독일을 재건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효과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했고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해 독일을 다시 유럽의 강국으로 일으켜 세웠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해 대미 협력을 강화했고,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현 유럽연합(EU)의 기반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이 누적됐고, 네 번째 총리 임기 중이던 62년 궁지에 몰리게 된다. 군사 기밀을 보도한 주간지 슈피겔 기자 5명을 체포한 언론탄압 사건이 터지면서다. 아데나워는 언론탄압을 주도한 국방부 장관을 옹호했다.
국민의 분노가 치솟았고, 아데나워 반대시위가 이어졌다. 결국 임기를 2년가량 남긴 채 물러났다. 그는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었고, 국민의 뜻에 따라 자리를 떠났다. 67년 아데나워가 숨졌을 때 독일인들에게 그에 대해 가장 높이 평가하는 점을 물었다. 대다수가 “소련에 끌려갔던 마지막 전쟁포로 1만명을 조국으로 데려온 것”이라고 답했다. 국민의 고통을 잊지 않고 끝까지 챙긴 지도자의 면모를 높이 산 것이다.
독일 국민은 2003년 설문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독일인’으로 아데나워를 뽑았다. 그는 책임지고, 내려놓았기 때문에 존경받는 지도자로 남았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정주채 목사
“미련 많으면 판단력 흐려져”… 정년 5년 남기고 아름다운 퇴장
‘아름다운 퇴장, 목사 정년 5년 남기고….’
2013년 말 이 같은 제목으로 언론에 보도된 한 기사가 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기사 주인공은 정주채(68) 목사. 그는 소속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헌법상 정년이 5년 남았지만 용인 향상교회 담임 목사직을 내려놨다.
“특별한 분들을 제외하고 대개 나이 예순을 넘기면 창의적인 사고나 새로운 에너지를 갖기가 쉽지 않아요. 유능한 후배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싶습니다.” 당시 정 목사가 밝힌 조기 사퇴의 변이다.
그의 ‘내려놓음’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1985년 서울 잠실중앙교회 담임목사를 맡은 뒤 “교인 1500명이 넘으면 교회를 분립하겠다”고 공언했던 그는 1999년 목표했던 교인 수에 다다르자 시무하던 교회를 떠나 용인에서 다른 교회를 개척했다. 그 교회가 향상교회다.
그는 이 교회에서 조기 은퇴하면서 또 한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원로목사 직제를 없앤 것이다. 분립하기 이전의 교회 시무 시절부터 따지면 30년 가까이 한 교회를 섬긴 그는 원로목사 자격(단일교회 20년 시무)이 충분한 데도 제도를 폐지하고 본인부터 적용받지 않았다. 은퇴했으면 말 그대로 ‘은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조기 은퇴와 원로목사 거부 등 거침없는 그의 ‘내려놓음’ 행보에 교단 선후배나 동료 목회자들의 시선이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 목사는 그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유익한 결정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폭풍전야 같은 탄핵 정국에 온 나라가 들썩이는 요즘, 정 목사는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특히 국가 지도자의 내려놓음을 두고 어떤 메시지를 건넬지 궁금했다.
“대통령 스스로 생각하기에 많이 아쉽기도 하고 미련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판단력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국민의 바람과 생각은 무엇인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한걸음 앞서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국민 바람·생각 무엇인지, 앞서 헤아리고 따라야”
입력 2016-12-09 2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