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는 고교교육 정상화 기여 대학 지원사업에 2014∼2016년 3년 연속 선정됐다. 2016년에만 7억 1000만원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교육부는 올해 지원예산 중에서 집행하지 않은 예산을 전부 회수하고 내년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를 부정 입학시킨 데 대한 제재다. 입시 개선의 주체가 입시부정을 저지른 꼴이다.
교육부는 이화여대를 특별감사할 작정이다. 입시부정에 연루된 입학처장을 비롯한 교수 3명의 해임을 요구하고 최경희 전 총장과 최순실, 정유라 모녀를 수사의뢰하기로 결정했다. 졸지에 총장과 교수 학부모 학생 모두가 피의자 신세가 됐다.
그렇지만 이화여대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대학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대학은 1886년 이화학당으로 출발했다. 명성황후가 하사한 이름으로 메리 스크랜튼(Mary Scranton, 1832∼1909)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화여대는 미국인 여선교사 룰루 프라이(Lulu Frey, 1868∼1921)가 1910년에 만든 이화학당 대학과에서 시작됐다. 프라이 선교사는 1893년 제물포에 도착해 1915년 이 학당에 사범과를 설치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범대학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이화학당 박인덕 교사를 수업도중 체포하고, 제암교회 성도 23명을 불에 태워 학살했다. 프라이 선교사는 이부자리와 사식 그리고 영치금을 넣어주고 조용히 박인덕 교사를 면회했다고 한다. 프라이 선교사는 한 달 넘게 제암리에 머물며 주민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제암리 사건 뒷수습도 도맡았다.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간 뒤 1921년 오하이오 벨폰테인에 묻혔다.
프라이 선교사는 이화학당 대학과를 설치하며 자랑스런 ‘이화인’의 상을 표명했다. ‘영어에 능통하고 풍금을 잘 타며, 국한문 성경을 잘 읽는 사람’이라고 썼다. 국제사회에서 자랑스럽게 활동할 수 있는 여성 교회지도자를 키우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일제에 강제 침탈된 나라의 억울함과 겨레의 아픔을 신앙으로 깨우치는 사람을 양육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진짜 이화인은 처음부터 정유라씨와는 사뭇 달랐다. 사교(邪敎)에 물들고 사리사욕에 눈이 먼 엄마 밑에서 자라, 교수에게조차 갑질을 행했던 그녀의 그림자에는 ‘이화’란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최석호의 골목길 순례자-이화여대와 룰루 프라이 선교사] 자랑스런 역사 먹칠한 이화여대
입력 2016-12-09 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