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김준엽] 정경유착 고리 끊으려면

입력 2016-12-08 18:38

정경유착 고리를 끊어야 한다.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여전히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는 게 드러났다. 기업들은 정경유착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낀다. 강제로 빼앗긴 피해자라는 논리다. 최근 만난 한 기업 관계자는 “동네 깡패가 으슥한 골목길로 불러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안 줄 수 있느냐”고 하소연했다. 동의한다. 힘없는 어린아이라면 순순히 주머니에 가진 걸 내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고 세계 시장에서 선진국 기업의 뒤를 따라가기 급급하던 시절이라면 기업들의 하소연이 와 닿았을 것이다. 수출 주도형 산업 구조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부작용이라고 생각할 여지라도 있기 때문이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88년 청문회에서 “달라니 줬다”고 말했다. 2016년에는 대기업 총수 8명이 “어쩔 수 없이 줬다”고 했다. 시간은 28년이나 지났지만 기업은 여전히 스스로를 힘없는 약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는 세계 11위까지 성장했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반도체, TV 등 주요 제품에서 세계 1위다. 현대차도 글로벌 시장에서 유수의 브랜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이 되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국민들은 기업의 성장을 보며 성취감을 느꼈다. 외국에서 한국 기업의 제품이나 광고를 보면 왠지 모를 뿌듯함도 생긴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국민들이 더 큰 배신감을 느끼는 건 예전과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다. 다 큰 어른이 골목길에서 깡패한테 돈을 빼앗겼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는 것이 정상이다.

기업은 피해자라고 호소하지만 국민은 ‘공범’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이제는 기업이 힘없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본다. 대기업 총수들이 TV 앞에서 거듭 사과를 해도 신뢰하기 어렵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청문회 말미에 “신뢰를 잃은 것 같다. 신뢰 받는 기업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기업에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신뢰 회복에 걸맞은 행동에 나서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해결책은 단순하다. 정치권은 부정한 요구를 하지 않으면 되고, 기업은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정답이다. 문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다.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이야기와 같다. 옳은 일임을 알아도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결국 달라지는 건 없다. 정경유착을 없애자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행동은 다른 얘기다.

LG그룹 구본무 회장은 청문회에서 재단 출연 같은 준조세를 “국회에서 입법으로 막아달라”고 했다. 정경유착을 막기 위한 제도적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에서 해야 할 몫이다. 기업들은 스스로 고리를 끊을 준비를 해야 한다. 기업 지배구조를 비롯해 선진국 기업에 비해 부족한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 약점이 없어야 부당한 요구에 흔들리지 않는다. 총수들은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빈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행동이 없는 다짐은 모래성처럼 금방 무너질 수 있다. 청문회에선 “누군가 감옥에 가야 끝날 것”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확고한 의지가 없고, 빌미 잡힐 일이 없게 기업을 경영하지 않는다면 사법처리를 받는다고 해도 정경유착의 악순환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 28년 후에 기업인들이 같은 일을 겪지 않기 바란다.

김준엽 산업부 차장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