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광장은 역사를 새로 쓰는 중이다. 광장은 마치 신문고를 두드리는 마당 같아서 그곳에 가면 요즘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지난 여섯 차례 주말마다 불 밝혀온 촛불함성이 그 주인공이다. 한국 근현대사는 광화문 앞 너른 마당과 사거리에서 일어난 오욕의 어둠과 영광의 빛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개신교회 여러 교단의 랜드마크도 광화문에 여럿 존재한다. 세종로와 종로의 십자길에는 감리교 빌딩이 있고, 대한문 방향으로 성공회 대성당이, 그 옆 정동길로 나서면 구세군 서울제일영문과 광화문 연가로 유명한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의 옛 건물이 고즈넉하다. 새문안길에는 헐고 다시 짓는 새문안교회가 위치해 있다. 모두 근대의 문화유산이다.
이 건물들은 화려한 빌딩 숲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실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감리교 빌딩은 오히려 동화면세점으로 유명하고, 성공회 대성당은 오랫동안 서울국세청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새문안교회 역시 주변에 들어선 호텔 때문에 시야가 방해받을 게 뻔하다. 문제는 이웃 건물 탓이 아니다. 우리 사회 속에서 교회다운 존재감이 없다는 현실이다.
감리회 본부에서 기획홍보부장으로 일하던 시절, 어떻게 하면 감리교 빌딩에서 교회 냄새가 나게 할까란 과제를 안고 지냈다. 빌딩 현관에 따뜻한 성구를 담은 배너를 다달이 바꾸어 걸기도 하고, 희망광장이라 이름 붙인 앞마당에서는 철철이 바자회와 봉사 이벤트가 열렸다. 감리교본부란 네온 간판을 크게 붙이기도 했다. 빌딩 로비에 ‘십자가 전시실’을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다. 모두 어떻게 하면 교회 건물답게 느껴질까 하는 궁여지책이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골목 안에 숨어있던 성공회 대성당도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꼭 90년 전인 1926년에 봉헌한 이래 덕수궁 돌담 곁에서 근대의 시간에 갇힌 듯 보였기 때문이다. 비로소 1987년 초여름 대성당은 그 실체를 세상 가운데 드러냈다. 민주화의 전기를 마련한 6월항쟁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로변에 놓인 기념 표지석이 증명한다.
단 한 번, 감리교 빌딩도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2003년 12월 경남 창원지역에서 일하던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 140여명이 피난처를 찾아 몰려온 것이다. 다행히 교단본부는 외국인 손님들을 위해 잠자리와 먹을 것을 마련해주는 등 기꺼이 안방을 내주었다. 건물 앞에서 농성 중이던 외국인노동자 둘이 잡혀가는 바람에 항의 차 목동 출입국관리소로, 화성 외국인보호소로 쫓아다니던 기억이 선명하다.
흥미로운 일은 피난 온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해 근처 광화문광장 구두 수선점 주인이 두 상자의 선물을 보내준 사실이다. 그 역시 무작정 상경했던 소년 시절에 옛 감리회관의 계단잠 신세를 졌다고 했다. 아직 교회의 인정이 남아 있던 때라 그곳에 임시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이 계기가 돼 광화문광장에 일터를 잡게 된 것이다. 그는 외국인노동자들 소식을 듣고 자신의 과거가 생각나 가족과 함께 떡과 부침개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들 때문에 감리교 빌딩은 도피성의 자격을 얻었고, 피난처란 성역으로 불렸다. ‘불법’조차 보호받을 수 있던 이곳은 그 시간만큼은 교회의 영역으로 존중받은 셈이다. 과연 오늘의 교회는 다시 성역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지금 한국교회는 자신의 안마당을 더 개방하고, 진실과 정의의 광장으로 더 나서야 한다. 낮아지고 낮아져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아야 한다. 이것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마 21:42) 참 교회의 모습이다.
송병구 색동교회 담임목사
[바이블시론-송병구] 피난처로 존재하는 사회
입력 2016-12-08 18:40